제목 | 욥의 참을성(QT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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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영경 | 작성일2000-10-05 | 조회수2,44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엄청난 부와 행복을 누리던 욥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자녀와 재산과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자신은 피부병때문에 물크러져 버렸습니다. 친구들이라고 와서 조언을 해준다고 속만 뒤집어 놓고 갑니다. 그러나 욥은 절대로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이 자신을 향해 돌아서신 것을 보고야 말리라는 마음을 먹습니다. 내게 욥과 같은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저런 의지로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아니 자신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잃지않는 소망을 보면서 소망을 가져 봅니다.
하느님을 믿은 후에 하느님께 평화를 달라고, 아니면 구하는 것을 달라고 많은 기도를 했었습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을때는 포기하고, 유혹에 빠져들면 그채로 구렁이 담넘어가듯이 넘어가고 또 정신차리면 구하고 이러한 과정의 되풀이였습니다. 저의 유일한 취미인 수영을 할때, 온몸에 힘을 빼고 물결에 몸을 싣는 가벼운 자세로 하느님을 대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나락인 듯한 시간 속에서도 그저 믿거니 하는 생각만 했지 정말로 욥과 같은 악착같은 자세로 인생을 온전히 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는가 하면 그 부분도 석연치 않습니다.
최근에 신앙생활에 변화가 있다면 신이자 인격이신 하느님 앞에서 가슴에 붙어서 나누려고 하지 않았던 비닐장막을 뜯어냈다는 것입니다. 대화가 가능하고, 이미 기도의 응답은 있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라는 것을 했습니다. 공부로 따지자면 지독한 열등생인 셈입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가 되어야 기도의 응답도 들을 수 있고, 진드감치 머물러야 회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이를 못참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이소리 저소리 물어보고 다니고, 그 대답에 상처받고... 이 추한 모습들 그것이 나라고 자학하고...
그러나 욥의 경우 악착같이 자신에게 돌아서신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큰 줄기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nice한 친밀감이 아니라 전 인생을 걸고 매달리는 진지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속에서 겪는 고통과 불행들 감수하면서 까지 따를 수 있는 엄청난 희망입니다. 아니 더 솔직히 감수하지 않으면 어쩔겁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느님을 잃지 않을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또 진드감치 기다려 잃은 것을 모두 회복하였습니다. 나는 욥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 중에 눈에 번쩍 띄는 것은 결국은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간직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흠없는 욥이 아니라 약하고 허물많고 돌아서면 죄짓는 미물이오나 당신께 간구하노니 당신을 일생의 소망으로 삼고 남은 생을 살게하여 주십시오. 당신 안에서 떨어지지 않고 열매맺음을 악착같은 소망으로 삼고 진드감치 기다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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