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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들의 봉헌은?(연중 32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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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00-11-12 조회수1,939 추천수9 반대(0) 신고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보이지 않았었지요? 지난 주일 저녁부터 어제까지 휴가를 다녀왔었답니다. 전라도에 있는 조계산에 가서 멋진 단풍도 구경하고,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멋진 자연경관도 체험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전라도는 아직도 따뜻한데, 이곳은 이제 제법 겨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에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생활 안에서 열심히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여행을 하던 중에, 명동 성당에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명동 성당에 온 김에 고백성사를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명동 성당 지하에 있는 상설 고백소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줄이 꽤 길게 서있는 것이었어요. 저는 '한 시간 정도면 내 차례가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저와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제 마음 속에는 나쁜 마음들이 생기더군요.

 

'저 사람은 뭔 죄가 그리 많길래 이렇게 오래 걸려.',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벌건 대낮에 고백소를 오나'

이렇게 저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겠다고 서 있으면서 오히려 죄를 짓고 있었지요.

 

거의 한시간 반 정도를 기다리고서 드디어 제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글쎄 신부님이 나오시면서, 잠깐 좀 쉬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어요. '드디어 내 차롄데'라는 생각과 함께 신부님에 대해서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이었어요.

 

이런 제 마음의 변화를 보면서, 저의 모습을 다시금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나 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 나에게 약간의 손해가 오면 곧바로 남을 판단하는 마음. 나는 무조건 옳고 다른 사람은 무조건 틀리다 라는 마음.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들의 마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제일 윗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오래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율법학자들의 모습이고,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이 모습이 혹시 나의 모습인지 우리 모두 진지하게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과 마음을 버리고,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비록 렙톤 두 개라는 적은 돈을 헌금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 칭찬을 받지요. 그 이유는 이 여인은 넉넉한데서 얼마를 헌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루 생활비가 될 수 있는 돈을 모두 헌금을 했기 때문이었지요. 양으로야 동전 한 닢에 불과했지만, 질로 따진다면 남김없이 바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해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바친 이 여인의 정성어린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고, 우리들도 이 모습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도 렙톤 두 개 중에서 하나 정도는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을 위해 하나를 남겨 두어야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쳤던 것이지요.

 

 

어떤 은행의 금고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먼저 백지 수표가 입을 열었어요.

 

"이봐, 아랫 거들, 내 이마빡에 뭐가 쓰여 지겠나?"

 

"그야 액수가 쓰여지겠지요."

 

"잘 맞추었어. 그러니까 나는 내 이마 빡에 쓰여지는 액수만큼이나 팔자가 급변하지. 따라서 너희같은 조무래기들하고 이렇게 같이 누워있는 것이 챙피하다고. 그래, 너희들은 어디 어디 다녀봤냐?"

 

그러자 만원짜리 지폐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 그래도 나는 화폐 단위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요. 일류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고급스런 곳은 다 다녀봤지요. 다시 말해서 저는 상류사회는 주욱 살펴보다가 조금 쉬러 여기 들어 왔다고나 할 수 있지요."

 

그러자 오천원짜리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만원짜리 형님처럼은 못돼도 그래도 저 나름대로 꽤 인정을 받고 지냈어요. 초일류는 아니더라도 중산층 이상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중, 상류층 이곳 저곳은 다 돌아다녀 봤다고요."

 

그러자 백지수표가 천원짜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천원. 너는 어디를 다녀봤냐? 한번 말해봐."

 

그러자 천원짜리가 기가 팍 죽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데도 자랑할 만한데는 없고요. 주로 성당의 헌금 바구니 안에 들어가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헌금을 많이 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이 봉헌하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단순히 미사 중에 봉헌 시간이 있으니까, 그냥 의무적으로 천 원짜리 하나 달랑 내어놓는 모습. 그리고 이것을 통해 주님께 봉헌을 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돈을 바치는 것만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시간을 바치는 것 역시 봉헌이고, 우리들의 희생을 바치는 것도 봉헌입니다. 또한 한 주간을 살면서 내가 겪은 아픔과 억울함, 오해와 실망스러움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주님께 바치는 커다란 봉헌입니다.

 

즉,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주님께 되돌아가는 봉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의 어느 부분만을, 어느 시간만을 주님을 위해 바치면서 커다란 봉헌을 한 듯이 큰 소리 치고 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율법학자의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2000년 전, 사람들이 봉헌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봉헌하는 것을 보고 계실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나 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헌금을 하고 있는지 아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헌금을 하고 있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있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박노해 시인의 글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시를 들으시면서, 우리의 삶 안에서 보다 더 아름다운 봉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참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셨으면 합니다.

 

나눔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가난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누려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누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나누겠다는

굳센 다짐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를 잘 나누어 쓰는 능력입니다.

두텁게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저 작은 여린 새싹은 이유가 있어서

떡잎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가 바로 살기 위해서, 자기가 바로 크기 위해서,

그 작고 여린 자기를 지금부터 나누는 것입니다.

가난함 그대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능력이 커가는 만큼 나눌거리도 커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고 참된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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