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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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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11-18 조회수2,387 추천수12 반대(0) 신고

평신도 주일강론

 

내가 살고 있는 산골짜기에는 첫눈이 내렸다. 아직도 뒷산 높은 봉우리에는 하얗게 뒤덥힌 광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것이 초겨울을 실감케 한다. 만물이 잠들어 가고 있는 이즈음에 교회의 달력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다음 주일이며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연중주일은 마감하고 대림절이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만물의 기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시기에 우리들은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뒤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을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고 있다. 하느님 백성을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평신도 주일이 제정된 것이다. 과거의 교회는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신자들이 글을 몰랐다는 것이다. 교회의 공용어는 라틴어였는데 소수의 성직자와 부유층만이 배울 수 있었다. 성서와 미사전례 공용어는 전부 라틴어였다. 그러니 신자들은 성서를 가까이 할 수도 없었고 미사에 참례해도 사제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마르틴 루터가 이른바 종교개혁을 일으키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우매하게 된 신자들은 성서를 읽을 수 없었으니 사제가 가르치는 대로 믿으면 되었다. 사제가 올바로 가르치는지 잘못 가르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각 민족이 자국어 사용을 권장하게 되고 성서가 영어, 불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의 충격을 통해서 가톨릭 교회는 성직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성서와 교리를 평신도들에게도 배우게 했다. 물론 라틴어가 아닌 각국의 언어로 말이다.

 

그러나 라틴어 사용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도 미사때 계속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65년까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 그러니 신자들은 미사에 참례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미누스 보비스쿰’(Dominus voviscum,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사제가 인사하면 신자들은 아무 뜻도 모르면서 ’엣 쿰 스피리뚜 뚜오’(Et cum Spiritu tuo, 또한 사제와 함께)하고 대답하였다. 신자들은 이런 말을 외우느니라 한글도 깨치지 못했으면서도 호랑이 같은 신부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찰고를 받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65년 이전까지는 ’미사를 본다’고 했던 것이다. 사제가 손을 벌렸다가 오무리고, 성체와 성작을 들어놀리고 내리는 동작을 그저 쳐다만 보았기 때문이다.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사를 본다는 의미 속에는 신자는 그저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뜻이 숨어있다.

 

또 신자들이 미사에서 구경꾼으로 머물렀던 이유는 바로 제대의 위치이다. 지금은 사제가 신자들을 마주보고 미사를 한다. 그러나 1965년 전까지는 신자들은 사제의 등을 보고 미사를 드렸다. 그러니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처럼 모두가 제대를 향해서 미사를 드렸다. 지금도 오래된 성당(명동, 약현, 풍수원)에 가보면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제대를 고쳐놓았지만 외국에 가면 아직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있다. 이런 제대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평신도들의 위치는 교회 내에서 하찮은 존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신자들의 교육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고,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은 평신도들이지 성직자들이 아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계층이 바로 평신도라는 것을, 교회의 주요 구성원도 평신도라는 것을 교회는 각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신자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다. 평신도들은 더 이상 성직자들의 꼭두각시처럼 살지 않고 있다. 각계 각층에 깊숙이 침투해서 평신도들은 신앙인으로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가정을 꾸며서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평신도들의 가장 고유한 사명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니까 그 가치가 축소될 수 없다. 성직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자녀출산과 양육이다. 또 평신도들은 훌륭한 복은 전도자이다. 나는 사제가 되면서 한 때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사제는 복음 전파하기가 너무 어렵다.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주 만나도 비신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회 속에서 비신자들을 늘 만날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들만이 진정한 복음 전파자라고 불릴 수 있다.

이제 신자들은 사제에 의해서 좌지우지하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운영과 영적성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예전에 ’발바닦 신자들’이라는 불명예를 벗어 던지고 참다운 신앙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성직자인 나의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동생 삼촌 조카가 모두 평신도이다. 평신도가 성직자와 대립되는 의미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안에서는 성직자 중심주의가 좀처럼 사라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성직자 자신에게 가장 큰 이유가 있지만 평신도들의 의식에 아직도 과거의 유물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부님이 말씀만 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의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먹고 살기에 바쁘겠지만 교회의 주역으로서 위상을 누리려면 성서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 본당의 단체장으로 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평신도의 역할은 본당 운영을 잘하는 데 있지 않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가지 않으면 활동이 끝나고 나면 허무함만이 남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평신도들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은 성직자들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천 년의 교회역사 동안 그리스도교가 발전될 때는 항상 평신도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지내고 나면 본격적인 겨울에 접어들 것이다. 밤이 길어지고 추워지면서 올 한 해를 정리할 시간이 많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례를 받고 평신도로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지하게 뒤돌아보자. 교회 안에서 주변인으로 혹은 방관자로 살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이 기쁘지 않고 보람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미사참례하려고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미사를 구경하지나 않았는지? 성당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고 성당 문밖에 나오기만 하면 그 때부터 비신앙인들처럼 살아왔는지? 성직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는 잘 하면서 정작 자신은 신앙인답게 살려는 노력은 했는지?

성직자와 대비되는 평신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결심해야하는 것이 바로 오늘 평신도주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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