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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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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11-25 조회수1,987 추천수16 반대(0) 신고

그리스도왕 대축일

가톨릭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선배 신부님들이 주일 강론만 없으면 신부생활이 참 편할 것 같다고 하시던 말씀이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평일 강론은 간략한 주제로 5분 내외로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그런지 나에게는 좀 쉽다. 그런데 주일 강론은 청소년부터 8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해야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늘 어렵게만 느껴진다. 더군다나  오늘 같은 날에는 무슨 강론을 해야 할지 도무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독서와 복음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아도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왕권 시대에나 통하던 개념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의문이 간다. 인류의 역사는 왕권 중심적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대다수의 민중들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흔적조차 없다. 사실 왕권시대에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왕족으로 태어기만 하면 죽는 그날까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온갖 복락을 다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동화를 읽어보면 왕자 이야기가 늘 등장한다. 왕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이상형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왕권 시대에나 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서 등장한다. 옛날에나 왕이 대단했지 오늘날에야 왕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존재이다. 상징적인 역할에 불과한 왕이 영국, 일본 등에 아직도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왕은 먼 옛날에 있었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마땅히 강론할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 예수님이 왕으로 재림하신다고 해도 자의식이 강하고 인권의 소중함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왕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고 해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일 강론을 하긴 해야겠는데 참으로 답답하다.

 

그러다가 교리시간에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직무를 받는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즉 사제직 , 예언직, 왕직이다. 그렇다. 나는 이 왕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의미를 묵상해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왕직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의 삶에서 출발한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 중에서 명예와 권력욕이 대단하다. 수많은 정치가들 중에서 진심으로 국민을 위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들의 내면에는 바로 섬김을 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아마 우리 성직자들의 내면을 살펴보더라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데에는 아마 정치가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 사제가 되려고 신학교에 갈 때는 정말 겸손하고 섬기는 사제가 되겠다고 수없이 맹세를 했다. 그러나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신부로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신자들을 섬기는 사제보다 섬김을 받는 삶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정말 이렇게 살다간 농담으로 말하왔던 것처럼 나는 죽어서 입만 천당에 갈 것 같다.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 때에(마태 25장) 판단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교리를 많이 배웠고, 성서를 많이 읽었으며, 헌금과 교무금을 잘 내며 신앙생활하였는지가 아니고,  극히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을 어떻게 섬겼는지에 달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사람은 싫어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어여삐 여기신다. 이렇게 보면 우리 성직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자들은 어렵고 힘든 세상 살이 속에서도 자녀들을 키우고,  이웃에 어려운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실천적인 신앙인들이기에 거의다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믿는다.

 

얼마 전에 이렇게 본당신부로만 사제생활을 계속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 경북 안동교구의 한 신부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정호경 신부님은 봉화군의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생활하고 계신다. 그분은 가톨릭 농민회 지도신부님으로서 유명하시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가지시게 되었다. ’나는 신부로서 지금까지 머리품과 입품만 팔아먹고 살았다. 그러나 남은 인생동안 손품을 팔아먹고 살고싶다’. 결국 그분은 나이 60이 거의 다 되어서 시골로 내려가서 손수 집을 짓고 논밭은 일구면서 살아가고 계시다.

 

모든 종교의 마지막 목적은 세상의 구원이다. 자신의 영혼을 구령하는 것에서 끝나면 그것은 참다운 종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그냥 신자수반 늘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그래서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는 상구보리(上救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라는 가르침을 최후의 목표로 삼는다. 자신의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는 세상에 나가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조금 큰 절에 가면 중앙에 대웅전(大雄殿)이 있다. 그 뒤를 돌아가면서 벽에는 열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목우자(牧牛子) 십도(十圖) 혹은 십우도(十牛圖)라고 부르는데 그림의 주인공은 동자와 소이다. 불교의 수행과정을 알기 쉽게 그려놓은 것으로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이루는 단계가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자세하게 그림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으니 가까운 절에 가거들랑 꼭 살펴보고 관계된 책도 구입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이 그림에서 마지막 장면은 깨달음을 이룬 동자가 보따리를 메고 장터거리를 지나가는 장면이다. 우리가 불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 구원해서 극락정토를 이루는 것이 그 목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비자들에게 천주교에 왜 입교하게 되었냐고 질문하면 대부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즉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입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후에 영세를 받고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재음미해 볼 때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머리로 입으로 그리고 생각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손으로 실천하는 삶을 얼마나 살았는지 말이다. 그럴리도 없겠지만(현대에는 대통령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이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로 갈라놓으신다면 그 기준은 분명히 섬김을 받은 사람은 염소의 무리에,

그리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양의 무리에 들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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