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용서함과 그 받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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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이다 | 작성일2001-04-24 | 조회수2,123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예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어른이 계셨는데 그분은 약주를 잘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그분에게 새로이 두 명의 제자가 생겼는데, 둘 다 술을 제법 먹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스승께서 한 제자를 불러, "너는 술을 얼만큼 먹을 줄 아느냐?" 하고 물으셨답니다. 그 제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소주 한 병까지는 마실 수 있습니다." 그 대답에 스승은 만족스럽게 '알았다!' 라고 대답하고 나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제자를 불러 역시, "너는 주량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 하고 물으셨답니다. 그런데 그 제자가 답하기를, "저는 소주 일곱 잔 밖에는 못 마십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스승님께서는 노발대발하시며 "괘씸한지고! 어찌 소주를 일곱 잔 씩이나 마신다는 말이냐!" 하시며 호통을 치셨답니다. 참고로 여기서의 소주의 양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소주의 양을 말합니다. 그럼 넷크리스챤 여러분은 누구에 대한 스승의 판단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두 제자와 스승의 관계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가끔씩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술 때문에 속상한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방금 올린 이 이야기는 술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대화 - 주제넘게도 기도라는 의미에서의 대화 - 에 있어서의 "황당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저는 니고데모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니고데모는 똑똑한 이스라엘의 스승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특별한 일' 이 생길 것도 알고 있었고,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에게서 이런 --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 이야기를 듣고 황당해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뱃속'까지 되짚을 정도입니다. 어떤 분의 말씀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새로운 시련 중 하나를 겪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름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알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인간 니고데모가 그 질문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했어도 예수의 대답은 여전할 것이요, 아예 모른다고 했어도 그분의 대답은 똑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안다고 하면 '뭘 안다고' 할 것이요, 모른다고 하자니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 혼란의 틈바구니를 그냥 놓아 두지 않고 예수께서 "그냥" 끼어드시기를................"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부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도 혼란스러워하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여기에는 저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에 대해 '이렇다'라는 대답도, 혹은 '저렇다'라는 대답도 시원찮게 여기시는 예수님! 이 와중에 무슨 확신을 얻을까마저도 고민하는 신앙인들과 그래도 믿음을 갖게 하는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
결국 이렇게 저렇게 대답을 해도 똑같이 "현재"에 대한 혼란이라고 진단이 나온다면, 그 전에는 어떠했는가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닐까요?
참고로 맨 위의 이야기에서 나중의 제자는 자신을 뉘우쳤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뉘우쳤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뉘우치고 훌륭한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높직이 들리우신 하느님, 그 하느님 뒤로 노을이 진다. 그 노을보다 더 붉은 피.
더이상 흐르지도 않지만 더이상 닦이지도 않는, 마냥 흐르는 그 선혈은
백성을 위한 바람이요, 백성을 향한 바람이요, 백성을 향한 마지막 숨결이라네.
높이 들어 올려진 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용서의 내 손길 구하시는, 나의 하느님.
용서로 깨끗해지기를 청하시며 피 흘리신 나의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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