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을 바라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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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1-05-07 | 조회수1,878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이태리에서 공부를 할 때 건축하는 친구들을 둔 덕분에 최신 건축사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때가 많았다. 어느 건축가는 집 안에 문이 없는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 방문이고 화장실 문이고 문이란 문은 하나도 달지 않는 집을 설계하여 화제라고들 하였다.
문은 공간을 구분짓는 역할을 한다. 때론 그 때문에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프라이버시와 내면성, 은밀성을 드러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나라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이러한 내명성, 신비성의 상징이기에 문이란 개념이 필요하다.
절에 가보면 절이 시작되기 좀 멀찍이에 일주문이라는게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공간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벌써 속세와는 다른 상징적인 공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이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 이 일주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 자신이 바로 문이시다. 우리와 하늘나라를 연결시켜주는 문이다. 그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이다. 그 문은 보통문이 아니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독립기념관의 그 문보다 더욱더 안전하고 막강한 방화문이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혼이라면 이 문을 늘 찾아야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 문을 여닫을 때 조심하여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 교육 중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침묵을 유지하여 다른 사람의 잠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해야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이겠지만 바로 문이신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라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 인생은 수없는 문(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내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도 나는 대문을 거쳐, 현관문을 거쳐, 봉쇄구역 문을 거쳐 방문을 거쳐 내실 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여러 다른 문들이 있다. 내 방 안에만도 창문이 또 몇 개인가?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우주적 공간을 살포시 내다볼 뿐이다.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쬐끔씩 내다볼 뿐이다. 이 문이 그냥 들어오고 나오는 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때 그 문은 바로 예수가 된다. 예수는 바로 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만나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방 안에 앉아서도 창문을 통해 하늘나라를 내다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에 바로 예수께서 계신 것이다. 오늘 비온 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정원은 더없이 싱그럽다. 매마름과 답답함은 더이상 보이지 않고 하늘나라의 모습을 잉태하고 있다. 바로 이 문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오늘 문을 지날 때마다 또 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잠시 엿보자. 그 싱그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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