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의 근심걱정을 어이할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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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1-05-11 | 조회수2,309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근심걱정에도 사로잡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근심걱정이 우리를 짓누르고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괜찮다, 걱정마라. 나만 믿어라>라고 하신다.
제자들 또한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한다는 것은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걱정의 내용은 무엇일까? 왜 제자들은 걱정하게 된 것일까?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유다의 배신으로 주님이 유다인들에게 끌려가게 되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함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상에도 함께 하지 않은 비겁함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나타나셨을 때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내면 깊숙히에서는 죄스러움과 미안함이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 모르게 만들었으리라.>
그런데 이제서야 제대로 주님을 모시고 섬기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떠나가시겠단다. 이 얼마나 당혹스런 일인가? 이제서야 제대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려는데 가버리신다니... 마치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다가 이제 좀 섬기려고 마음을 먹는데 이미 부모는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어 통곡하는 자식의 심정처럼 제자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으리라. 아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자신이 그토록 비참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러한 근심걱정과 마음의 혼란을 감지하신 주님께서는 <얘들아, 걱정마라. 나만 믿어라> 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당혹감을 주고 너희의 내면의 죄를 묻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의 마음 괴로워함을 보고 이미 너희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으니 걱정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바로 내 아버지이시고 내가 그분께 가서 비록 너희 자신은 스스로를 비겁쟁이요 쓸모없는 죄인으로 여길지 몰라도 너희를 위한 방을 마련하겠으니 나만 믿으란 말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인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란 말이다.
더이상 너희가 지은 과거의 죄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죄인이야, 용서받을 수 없어> 이런 죄책감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갖지말아란 말이다. 내가 있지 않는냐? 내가 누구니?
내가 바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냐? 내가 바로 진리가 아니냐? 내가 바로 생명이 아니냐?
걱정일랑 붙들어 매어라. 내가 알아서 다 하마. 너희가 할 일은 <내가 가르쳐 준 것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에 옮기기만 하여라.> <너희가 깨달은 바를 행동에 옮기기만 하여라.>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한 세상 살다가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우리가 가야할 목표, 목적지는 예수님이 가시는 목적지, 즉 아버지의 품이요 하느님 나라이다.
그런데 이 곳은 우리 힘만으론 갈 수가 없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 우리 양떼를 위한 문이신 분, 그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온갖 죄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빽으로 우리는 그곳에 이를 수 있다.
그분이 거짓말 하겠는가? 그분 친히 <내가 거짓말 하겠는가?> 라고 반문하신다.
그분의 말씀을 한번 믿어봄직 하지 않겠는가? 믿져야 본전이지 않겠는가?
그래 온갖 근심걱정을 내 마음에서 몰아내자. 안되면 좀 몰아내 주십사 그분께 청하자. 우리의 든든한 빽이신 그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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