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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쌍한 사람들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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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우진 쪽지 캡슐 작성일2001-09-17 조회수1,755 추천수16 반대(0) 신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기들끼리 여러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외모, 성격, 성적, 가정 환경, 주먹 등등 그런 것들 말이다.

 

학교에서 주먹으로 한 자리를 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다른 기준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자신들이 학생이기에

학생으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자신들보다 잘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한 풀 꺽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어찌 사용하는가?

무엇을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를 잘 하려 애쓰는가?

 

물론 자신들보다 못한 아이들을 도와주며

멋지게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이 공부를 잘 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를 잘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어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오로지 사회적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명문 대학을 나오고

이 사회의 리더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단지 공부를 잘 한다는,

명문 대학을 나왔다는,  

그런 이유만으로 말이다.

과연 이런 기준들이

모든 기준을 일소할 만큼의 기준이 되는가?

 

오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당시 사회에서 가장 냉대받던 계층의 하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준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말이다.

 

학창시절 자신의 학업을 위해

자신보다 어려운 아이들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던 이들이

오로지 자신의 학업을 위해

부모, 친구, 주변 사람들의 희생만을 요구했던 이들이

 

이 사회의 리더가 되어

사회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이 사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측은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창시절 공부했던 수학 공식, 영어 단어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살상의 무기도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오늘의 우리 주변에서 종종 목격하게 된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난 과연 지금 하는 일을 무엇을 위해 하고 있는가?

난 자신에게 물어봐야 겠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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