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아무도 정확히 몰라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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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09-27 | 조회수2,020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복음(루가 9,1-9)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면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이견들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신가?’는 질문에 대하여 헤로데만 갈피를 못잡고 있을까? 예수에 대한 소문은 아직도 분분하다. 이슬람교도가 생각하는 예수, 유대인이 생각하는 예수, 통일교도가 생각하는 예수, 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그만 두고라도, 심지어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똑같이 고백하는 기독교인 안에서도 예수에 대한 인식은 제멋대로이다. 그렇다면 예수는(하느님은) 정확히 누구시며 어떤 분이실까?
하느님은 맨 처음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출애 3,14)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알려 주셨다’는 말은 단순히 그를 부르는 수단이 아니라 바로 그의 존재(정체) 자체를 알려준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이유는 인간과 통교하고 싶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고 무엇보다 구원해주시고 싶어서라고 배웠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느님은 "나는 곧 나다"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씀으로 먼저 자신을 열어보이셨으며 나중에서야 "야훼"라는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여러 학설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대답은 하시면서도 인간의 언어의 제한 속에 있기를 거부(경계)하시는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 안에 주님을 묶어두려는 교만이다. 자칫하다가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저지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의 하느님관은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내가 필요한 하느님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라는 제도적 무기에 현혹당하고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지 가다가 자주 되돌아 봄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하느님이 진짜인가 아닌가 이런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생각해보고 싶다면 "하느님 체험, 환상인가 현실인가",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의적인 무조건적인 회의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회의는 신앙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하느님을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자부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하느님은 소문이 무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만큼 인간의 좁은 인식 안에 정확하게 제대로 파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한 명이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하느님은 그가 만들어낸 허상의 하느님일 가능성이 크다. 갈피를 못 잡는다고 성급히 하느님을 정의 내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평생 살아도 다 모르는 게 부부다. 그래도 사랑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아니 그래서 어쩌면 더욱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통해서 사랑을 익혀가고 믿음을 쌓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어찌 하느님을 안다고 속단하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예수가 하느님이라면 아무도 그분의 정체를 정확히 몰라야한다. 그래서 헤로데가 그분을 한번 보고 싶어했듯이 그래서 우리도 그분을 한번 직관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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