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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1-10-19 조회수1,706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 28주간 금요일 말씀(로마 4,1-8)

 

바울로 사도는 인간은 행위(공로)가 아닌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의화)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당시에 유다교인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얼마나 지켰는가 하는 공로에 따라 하느님께 올바른 관계로 인정을 받는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혀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기에 바울로사도는 가는 곳마다 그 생각을 깨버리려고 애를 썼다.

 

1세기 후반 야고보서에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야고보 사도의 의도는 당시에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신자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4세기에 펠라지우스는 당시의 급속히 늘어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활방식이 비영성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발견하고 선을 위한 인간의 의지 결정과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단지 인간이 따라 해야 하는 모범으로 격하시키게 되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론’으로 반격하였다.  원죄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은총을 입지 않고는 도저히 구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은총론을 더욱 강조하려다가 결국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은총의 힘으로 구원되던지, 그렇지 못하던지 모두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까지 비약 발전하였다.    

 

역사는 흘러, 16세기에 종교가 분열되면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으로의 주장이 난무하고 이후 수세기에 걸쳐 믿음이냐 행동이냐의 싸움은 이어져왔다. 최근에 여기에 대한 서로의 극단의 주장들을 인정하고 다시 화합하는 움직임을 가진 것으로 안다.

 

세월을 이렇게 짧게나마 거슬러 돌아보니 인간이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같다.  어떤 상황의 개선을 시도하며 참신한 주장을 펴는 것은 그 사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 극단의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역사가 평가를 하겠지만 그 일에 연루되거나 당시를 사는 사람들은 혼란한 다툼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동양 사람들의 감각에 의하면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는 논쟁이다.  행동 없이 말만 하는 것을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과 육, 선과 악, 유와 무, 성과 속이 확연하게 구별되어 이분으로 나뉘는 것은 논쟁하기 좋아하는 서양사람들의 이야기이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있는 듯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다’는 말을 하고 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들이다.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처럼 사람도 단칼에 베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우리들이다.  ’몸 가는 곳에 마음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서양사람들처럼 ’대립적인 이원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나누었을지라도 서로 양분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세계 속을 넘나드는 ’조화로운 이원론’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애초에 우리에게 성서가 먼저 전해졌다면 있지도 않았을 논쟁에 아직도 열을 올리며 분열을 초래하는 일은 없어져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말씀의 토착화’는 우리의 사상으로 다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 또한 동과 서의 나누기를 위한 것이 아님을 유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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