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멍에'와 '짐'구별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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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12-12 | 조회수2,043 | 추천수20 | 반대(0) 신고 |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말씀(이사 40,25-31; 마태 11,28-30)
’멍에’는 달구지나 쟁기의 체를 잡아매기 위해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나무를 일컫는다고 사전에 쓰여있다. 그러니까 멍에 자체가 짐이 아니고 짐을 지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며, 또한 어떤 일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한 준비태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짐은커녕 멍에만 메고도 비틀거릴 정도의 무게로 멍에를 만들었다면 얼마나 멍청한 사람일까? 그런데 이 멍청한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이 놀랍지 아니한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그렇게나 싫고 무섭고 피하고 싶었던 일들도 막상 부닥쳐 잘 처리했던 경험도 많았었다. 즉 대부분은 짐을 지기도 전에, 일을 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미리 걱정 근심하는 과정이 더 힘겨웠던 것이다. 이렇게 멍에를 더 큰 짐으로 만들어 허덕이고 비틀거렸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다.
오늘 예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 모두를 부르신다. 분명 예수께서는 짐을 없애주마고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들 스스로 잘못 만들어서 지고 있는 불량품 멍에는 벗겨내고 편하고 가벼운 당신의 멍에로 바꾸어주시겠다고 하신다.
당신의 멍에는 튼튼하지만 가볍고 몸에 잘 맞아서 짐을 지기 편하게 되어있는 특수 신소재인 모양이다. 멍에란 일을 하기 전의 준비태세를 말한다면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 일에, 인생의 대소사 앞에서 우리는 겸허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이라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도 아니며 나쁜 일이라 해서 아주 나쁘기만 한 일도 아닌 것임을 나이가 먹어갈수록 많이 체험한다.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을 차분하게 맞이하며 도피하지 않고 자신하지 않고 헤쳐나가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요즈음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는 말을 많이 듣고, 피부로 느끼고 있다. 어려운 현실을 뚫고 나갈 방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점집도 찾아가고 무당도 찾아간다. 오늘 아침도 어떤 신자가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무당을 찾아갔더니 집에 귀신이 많아서 부적을 붙여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대로 했는데 계속 마음이 찜찜해서 부적을 떼려고 하니 이번엔 부적은 스님이 태워버려야 탈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결국 절에 찾아가 태워버리기는 했는데 그래도 왠지 신부님이나 신자들이 와서 기도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내가 누구와 같다는 말이냐?" 우왕좌왕 하고 허덕이고 비틀거리는 우리 허약한 인생들에게 오늘 독서는 말씀하신다. 인간사 좁은 영역에만 매어있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라."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은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라고.
짐은 멍에가 지는 듯 하지만 실은 소나 말이 지듯이, 우리의 힘과 슬기로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는" 힘의 근원은 누구신가? 예수님의 멍에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보는 자세 즉 그분이 힘과 지혜와 능력의 원천이심을 믿고 바라는 자세인 것이다. 그런 자세를 늘 내 몸에 딱 맞게 견지하고 있을 때,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그분의 힘으로 가볍고 편하게 짐을 나르게 되는 것이리라. 그 때에야 나의 짐은 나를 너무 가볍게 만들지도 않고, 짓누르지도 않는 진정한 길동무요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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