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왜 다른 아이들은 구하지 않았나요?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신앙 가르치기(1/15)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1-12-28 조회수1,908 추천수9 반대(0) 신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말씀(1요한 1,5-2,2; 마태 2,13-18)

 

어느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다른 아기들의 목숨은 버려두고 자기 아들만 구한 것에 대해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 밑바탕에는 하느님은 왜 무고한 어린 아기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지, 과연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인지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한번쯤 이런 회의를 품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먼저 우리는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고 있다. 성서저자는 예수의 성장배경이나 공생활의 사건을 시시콜콜 전해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유년 사화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거의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복음사가의 신앙 고백을 몇 개의 그럴듯한 이야기 안에 듬뿍 담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의 유년기는 다섯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즉 ’예수 탄생예고’, ’동방 박사들의 예방’, ’에집트 피난’, ’아기들의 집단 학살’, ’에집트에서 돌아옴’으로 연속되어 있다. 마태오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는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는 복음이다. 유대인 독자라면 이 제목들만 보아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모세의 탄생사건과 아주 흡사하다.

 

파라오의 명령으로 히브리 사내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에집트 궁정에서 자라난 모세의 이야기와 헤로데왕이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는 위기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에집트로 피난갔다 돌아오는 이야기. 모세와 예수는 가장 강력한 인간(왕)의 잔악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구출되어 하느님의 보호로 자라나 백성을 구원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복음사가는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1,21)할 분이시라는 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서는 모세와 연관된 구성이 눈에 띈다. 다섯 개의 긴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 복음서 전체도 그렇지만 다섯 개의 유년기의 에피소드 역시 모세 오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 ’열개의 말씀’(십계명)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산에서 스스로 복된 말씀을 반포하시는 주님이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가장 어두운 시기인 바빌론 유배 당시, 학살당한 자식들의 어머니들의 참혹한 울부짖음이 회상된다. 유배는 제 2의 종살이 체험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역하고 지은 ’죄의 응벌’이었다. 그러니까 복음사가는 바빌론 유배의 역사를 회상시키며 예수께서는 이러한 죄의 종살이로부터도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내실, 모세를 능가하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유다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의 끝을 모두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맺는 것도 성서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유년사화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어떤 분으로 신앙하고 있는지를 증언하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이들을 다 놓아두시고 예수만을 구했는가에 대해 골몰할 필요도 없고, 한 명의 구세주를 위해서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의아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오늘 성서말씀을 읽으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또는 무관심 속에서 무고하게 학대받고 버려지고 심지어는 생명을 빼앗기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낙태되고 있는 죄없는 아기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은 그 책임이 하느님이 아니고 사람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사실 우리를 편안하고 안락하지 못하게 만드는 예상치않은 아기의 탄생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부도덕한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또 다른 헤로데가 되든지...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다른 요셉이 되든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반드시 우리가 져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