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순풍에 돛 단 듯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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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1-09 | 조회수1,729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말씀(마르 6,45-52)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후에 일어난 기적이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신비한 이 기적을 잘 이해하도록 복음사가는 하나의 단서를 이야기 말미에 제공한다. "제자들은 너무 질리어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에 대해서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에 우리도 당황하고 질린다면 우리 역시 빵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 마음도 완고하다는 말이 된다. 꼭 콜롬보 형사가 있어야 풀릴 것 같은 단서이다.
어제 빵의 기적의 핵심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시편에서 노래하던 ’참된 목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이 기적도 그분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어제는 대상이 오천명이 넘는 군중이었는데 오늘 기적을 보여주는 대상은 제자들에만 국한된다. 즉 제자들에게만 하는 좀더 심도있는 특수교육인 것이다.
’물위를 밟으시는 분’은 말할 것도 없는 하느님의 모습이다.(욥 9,8 참조;시편 18,15-17 하바 3,8-15 등) 또 역풍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도와주시려 오실 줄 알았던 분이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했다" 는 것은 또 무엇인가? 캄캄해서 주님이 못보고 실수했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나쳐 가시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간청하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을 때(출애 33,21-23; 1열왕 19,11-12) 주님이 취하신 행동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다. 다만 지나쳐 가시는 그분의 영광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제자들에게 "나다!" 하고 당신을 밝히시는 것은 모세에게 하느님 자신을 처음 알려주실 때 쓰던 똑같은 표현으로써, 성서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쓰는 전형적인 문구이다. 그러니 이 기적은 그분이 주님이심을 핵심제자들에게만은 좀더 명확하게 가르치려는 특수교육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분이 계시지 않은 동안, 배는 역풍(맞바람)에 꼼짝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풍랑에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다는 다른 기적이야기와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그 때는 그분이 배에 계셨어도 그분의 능력을 믿지 못한 제자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이제는 그분이 배에 안 계신 상황이다.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에 그분이 계시지 않고 제자들끼리 있을 때는 일보도 전진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말이 아닐까? 아무리 노를 죽어라 저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교회가 어디 있으랴?
있다. 아니 많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교회라 한다면, 한명이 타도 두명이 타도, 가정도, 구역의 모임도, 신자들이 있는 곳이면 모두 교회가 된다(’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초대교회 때는 이렇게 광범위하게 썼다.) 그렇다면 그 교회들이 ’항상’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고 있는가?
우리 마음 한편에 밀어놓다 못해, 잠시 외출증을 끊어주는 경우는 얼마나 자주일까? 우리 구역모임이, 공동체가 항상 주님을 모신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나의 뜻, 나의 단체의 이익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님을 외박시키고 있는 경우는 혹시 없는가? 주님은 하늘의 거처에나 계셔야 한다며 장기 휴가를 보내 놓고 있는 경우까지는 아닌지...
갑자기 신앙생활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의 나의 모습이나 쌈박질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주,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보면 주님이 기다리다 못해 찾아오셔도 반갑기는 커녕 유령으로 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분이 나의, 우리 모임에, 교회의 중심에 항상 자리잡고 계실 때, 역풍은 끝나고 순풍에 돛단 듯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게 됨을 잊어선 안된다는 말씀이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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