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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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1-10 | 조회수2,081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주님 공현 후 목요일 말씀(루가 4,14-22ㄱ)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는 루가복음에서 예수의 첫 복음선포활동이다. 결과적으로는 고향사람들의 몰이해와 배척으로 끝나는 예수님의 실패담은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일막, 즉 경탄을 자아내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는 것까지만 나타나있다.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에서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신 예수님은 성서를 읽으려고 일어서셨다. 당시의 안식일 예배 순서는 처음에 쉐마기도(신명 6,4-9)를 바치고 18조항의 기도문을 바친 후,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차례로 봉독한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되는데 보통 랍비들이 맡는 이 부분은 덕망있는 평신도가 대신하기도 했다. 아마도 갈릴래아에서의 소문이 이곳까지 퍼진듯(14-16절) 예수께서는 요청을 받아 설교를 하시게 된 모양이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 이런 대목을 찾아 읽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이사 61,1-2; 58,6)
하필 왜 이대목인가? 이사야의 이 대목은 최종적으로 오실 메시아가 오셔서 할 일을 가장 잘 묘사한 부분이다. 즉 온갖 억압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자,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시켜줄 위대한 종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여기서 ’가난한 이’는 포괄적인 의미로 정신적인 육체적인 경제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니 해방자의 손길이 필요치않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그분을 온 인류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은혜로운 해(희년)가 바야흐로 온 세상에 선포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알고있을 메시아에 대한 이 대목을 예수께서는 과연 어떻게 설명해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예수께로 쏠린 숨막힌 순간이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오늘’ ’이 자리’에서 보고있다는 선포이다.
사람들은 확신에 가득찬 위엄있는 말씀에 모두 경탄을 금치 못해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만 있었다면,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은 실현될 수 있었으련만....
그렇게 쉽고 간단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고 이 고생을 하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저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보라.’는 계속되는 의심과 거부는 은총의 희소식을 밀어내고 급기야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고까지 시도한다.
입버릇처럼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희소식을 가져다 주어도 도대체 믿으려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경험담을 들려주며 희망을 갖게 해보려고 해도 막무가내 자신의 조건과 상황과는 다른 점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거부하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뚝 떨어지지 않는 것은 구원이 아닌 것이다. 혹시 그날 그 자리에 주님이 나타나신다 해도, 어디서 태어났는가? 누구의 아들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 조목조목 테스트하려 들 것같은 사람들이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처럼....
은총은 믿는 자의 것이다. 그 어떤 날 올 희년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듣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희망을 두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해방이다. 이번 주 내내 정기 검사를 위해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았다. 어제는 특수한 식사 때문에, 또는 방사능 치료 때문에 죽을 곤욕을 겪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 나는 부작용이 적어 그럴정도의 고통은 아니었으니 새삼 얼마나 감사했는지.... 남의 불행을 보고 감사를 느낀 것같아 남몰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으니 특수한 식사, 특수한 치료조차도 생전 처음 해보는 ’놀이(?)’처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대처해나가려는 긍정적인 생각이 쓸데없는 근심과 불안을 줄여주어 부작용을 최소한 감퇴시켰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처지와 상황, 조건에 있든지 ’오늘’ ’이자리’에서 ’주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그것에서 해방은 시작되는 것이리라.
사족; 오늘은 제 자랑을 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용서하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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