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대받는 어린양(돈더스 신부님의 글) | |||
---|---|---|---|---|
이전글 | 뜻대로 안되는 세상(1/21) | |||
다음글 | 오늘의 복음과 묵상 | |||
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2-01-20 | 조회수2,327 | 추천수19 | 반대(0) 신고 |
오늘은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조셉 G.돈더스 신부님의 묵상글을 올립니다. ’주일 복음으로 하는 기도와 설교’ 그리고 ’예수, 그 낯선 분’ 이라는 돈더스 신부님의 두 권의 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벗님들의 신앙생활에 좋은 길벗이 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천대받는 어린양 (주일 복음으로 하는 기도와 설교 中 연중2주일 가해)
요한이 예수를 보자, 그분을 가리켜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는 덧붙였다. "하느님의 영이 그분 위에 계시도다."
요한의 말이 청중에게는 저주의 말로 들렸는데, 왜냐하면 청중은 그가 비유한 양에 대해서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전통에서도 양은 무리의 온갖 더러운 죄를 짊어진 채 밧줄에 묶여져 광야로 보내지거나 도살당하는 동물이었다. 하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어린양이다.
신학자들 중 더러는 하느님께서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이렇게까지 전해도 될까 싶지만) 괴물이 되시어 당신 아들의 피를 악착같이 요구하셨고 강요하셨다는 논리를 전개시켰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피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피도 보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을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희생물을 바라지 않으신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우리의 행복-만을 관심에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살라고, 죽지 말라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다운 삶이 영위되는 곳이다. 여러분은 이를 은총이라고 부르고, 구원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는 같은 맥락으로 통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으로 말이다.
성령이신 예수의 영을 약속하신 것은 오로지 인간다운 삶에 관심이 두어서지 다른 이유는 없다. 여러분과 나를 포함하여 온 인류에게 있어서, 그분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고 우리의 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 그런 어린양이 아니셨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진면목이다. 그분은 소경을 보게 하셨고 무지한 이들을 깨우쳐 주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생명이다." 그리고 그분은 굶주린 자에게 먹을 빵을 그리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셨다.
그분은 포도주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으시고, 성대한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9백 리터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어 소님들에게 내놓으셨다.
그분은 말씀으로만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추종자들에게 당신의 영을 주셨고, 그러기에 혼자 힘으로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단지 사람들을 이 세상의 풍파로부터 높고, 마르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피신시킨 그런 어린양이 아니셨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창궐한 죽음의 세력들을 모조리 물리치라고 말씀하셨다. 질투, 시기, 미움, 인색, 인종 차별, 파벌주의, 빈곤, 고통, 고문과 폭력, 탐욕과 허여, 질병과 죽음을 당신께서 모두 물리치셨듯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런 어린양이라고 해서 그분을 속단해서는 안 되며, 예수께서 그런 어린양이라고 해서 그분을 착각해서는 안 되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어린양이라고 해서 우리 자신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자기의 책임을 만만한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그런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탐욕을 부리면서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 "내가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거다." 우리는 인사 불성으로 술을 마시면서 사회가 썩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내가 아니라, 사회가 잘못된 것다." 우리는 창녀들과 놀아나면서 대학 캠퍼스가 반사회적이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내가 아니라, 대학이 잘못된 거다."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결혼하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으면서도 그 책임을 세상에 전가시킨다. "잘못은 세상에 있지, 나에게는 없어." 우리는 뇌물을 바치고 도둑질하고, 음식물을 그냥 버리면서, 그 탓을 썩어 빠지고 훔치고 낭비하는 사회에서 살기 때문이아고 말한다.
우리는 부자와 가난한 이의 격차에 대해서 연설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연설하는 것을 즐겨 듣는다. 우리는 열심히 듣고 박수 갈채를 보내지만, 정작 환경 미화원과 세탁소 직원, 웨이터와 야간 경비원, 우리 주위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마다 우리의 어린양,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 있다.
예수를 아주 충실히 섬겼던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다른 이의 화장실을 말끔히 치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그리 삭막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의 방식인 비폭력으로 모든 이의 유익에 기여한 공로로 말미암아 당대에 인도의 얼굴을 변화시켰던 사람, 마하트마 간디다.
우리는 다른 방법이 아닌, 예수와 같은 방식으로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