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궤변일까? | |||
---|---|---|---|---|
이전글 | 소멸의 아름다움 | |||
다음글 | 괜찮아 | |||
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3-04 | 조회수1,513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태 18,21-35)
민족에 따라서 좋아하는 숫자와 싫어하는 숫자가 있다는 것은 숫자를 단순히 양(量)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질(質)-의미-로 이야기하는 경우를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예수께 묻고 있다. 그러나 묻는다기 보다는 ’일곱 번이나 용서한다면 저의 자비심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하며 자신의 너그러운 마음을 은근히 칭찬받고 싶은 내색이 역력하다. 왜냐하면 셈족의 숫자 개념으로 7이라는 것은 충분함, 충만함, 완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고 베드로의 예상을 뒤엎으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7곱하기 70의 수량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 7의 70배수 즉 끝없는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해주라는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한번 이렇게 이해해본다. "너는 누군가를 단 한번도 용서해준 적이 없어야 한다." 라고...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용서>는 하느님께만 해당되는 단어이다.
예수께서는 곧 이어 비유하나를 들려주시는데 이 안에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숫자가 등장하고 있다. 도대체가 있을 수도 없는 이 이야기(우화) 안에서, 일만 달란트를 빚 진 사람과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 속에 감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모두 나 자신의 두 모습이다.
일만 달란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노동자 하루 임금이 일 데나리온이니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백날을 일해서 갚으면 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6000일(20년)을 일해야 일 달란트(1달란트=6000데나리온)이니까, 일만 달란트면 6000 곱하기 일만 즉 <20만년을 일해서 벌어야 하는 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대손손 결코 갚을 수 없는 금액을 말한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꾸어주는 황당한 왕이 어디있으며 또 그것을 한마디로 탕감해주는 정신나간 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하늘나라"에 있다고(33절)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으셨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황당하고 정신나간 용서를 해주시는 왕이신, 주님께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왕에게만 빚진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동료 인간에게 어느 면으로든지 서로 빚(=잘못)을 지고 사는 인간들이다. 그 빚은 왕에게 진 빚에 비하면 빚이라고 말할 수도 없이 너무나 작은 것이어서 돌려주고 돌려 받고 할 값어치도 없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는 우리끼리는 근본적으로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경험상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중 하나가 용서인것같다. 그렇게 힘든 것은 용서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그렇게 힘드는 용서를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무한대의 용서>라는 것은 결국 수를 헤아려볼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수를 헤아려 볼 수 없는 경우는, 수가 너무 많아 죽을 때까지 세어보려 해도 안되는 경우던가 아니면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숫자 ’0’의 상태이던가 둘 중의 하나이다. 나는 <0>을 선택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최후의 심판(마태 25장)의 비유에서 나오듯이 "주님, 제가 언제 주님께 그런 일을 해 드렸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모습이다. 도대체가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의식> 조차도 없는, 늘 그 행위가 습관이 되어 살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선행은 이미 체질화 되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바도 없고, 기억하고 있지도 않다는 의미이다.
용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했다는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일일이 몇번 용서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미 용서가 아니다. 단 한번도 용서했다는 기록조차 머리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참된 용서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엄청난 잘못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다른 사람의 잘못 역시 이해가 되고 연민이 생기는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누군가를 용서 한다기 보다는 <화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비록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잘 모르고 있는 때라도... 내가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허구헌날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나와 같은 동류의 인간일 뿐이다. 아무리 조심한다해도 살아가면서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누구에겐가 늘 상처를 주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용서할 수가 없다. 다만 화해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사랑까지 하며 살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이 되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