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비로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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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2-03-05 | 조회수1,963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2002, 3, 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마태오 18,21-35 (형제가 죄를 짓거든 몇 번이고 용서하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주님,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하고 여쭈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하시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고자 하는 어떤 왕과 같습니다. 왕이 (셈을) 밝히기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왕에게 끌려 왔습니다. 그가 전혀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주인은 그 자신도 아내도 자녀도 팔고 그가 가진 것은 모두 처분하여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종이 엎드려 주인에게 절하며 '제 사정을 봐주십시오. 당신께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은 측은히 여겨 그를 풀어 주고 그 부채를 삭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기 동료 종 하나를 만나자 그를 붙잡고 목을 조르면서 '빚진 것을 갚아라'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동료 종은 엎드려 간청하며 '내 사정을 봐주게, 그러면 자네에게 갚아 주겠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아 물러가서는, 빚진 것을 갚을 때까지 그 동료 종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동료 종들이 그 벌어진 일을 보고 몹시 민망한 나머지 가서 자기들의 주인에게 그 일을 모두 자세히 일러바쳤습니다.
그 때에 그의 주인은 그를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모두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 그의 주인은 진노하여,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각자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입니다."
<묵상>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이 때문에 상대방이 받은 상처를 잘 압니다. 비록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속으로는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청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용서할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청했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망설이게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과연 왜 용서를 청하지 못할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씻지 못할 커다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자비롭지 못하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자비롭지 못한 내게 용서를 청하여 더 큰 화를 입기보다는 시간이 흘러 모든 잘못이 잊혀지기만을 기다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내게서 자비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어떠한 죄라도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비로운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수히 많이 용서하라는 뜻도 되겠지만, 항상 용서하는 마음, 즉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자비롭지 못한 사람은 결코 용서해야 할 순간에 쉽게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용서란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 소유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어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은 것입니다. 도둑질을 했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빼앗은 것입니다. 몸을 때려 상처를 내고 욕을 해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이는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것입니다.
용서란 무엇입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삭쳐 준 주인처럼, 나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그에게 거저 주는 것이 아닐까요.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빼앗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재물을 줌으로써 나를 나누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내어줌으로써 오히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1달란트=6,000데나리온, 1데나리온=하루 노동 품삯, 1달란트=6,000일의 품삯=약 17년의 품삯, 1만 달란트=약17만년의 품삯)나 되는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백 데나리온(약 3개월 품삯)의 자기 재산에 눈이 멀어 친구를 감옥에 가두어버린 종의 무자비함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백 데나리온이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 일만 달란트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사무친 원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자비, 즉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비하여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용서하기 힘들 때 주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용서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용서를 낳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많은 죄와 잘못이 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면 사람 사는 세상은 더러운 곳이 아니라, 용서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하나 하나가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산다면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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