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떠나는게 유익하다는 것은? | |||
---|---|---|---|---|
이전글 | 사제들을 위한 묵주기도 100만단 바치기 | |||
다음글 | 오늘을 지내고... | |||
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5-07 | 조회수2,031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오늘 복음(요한 16,5-11)을 읽고 있으니... 옛날 어느 성당에서 강의할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는 이 대목 - 예수님이 협조자를 보내시겠다는 말씀과 그 협조자가 와야 제자들에게 더욱 유익하다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하나의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TV 에서 지능이 모자란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청하였습니다. 그분은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님이었는데 아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않고 일반 학교에서 정상인들과 함께 지내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세상이 거의 정상인(?)들의 세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었던 것이죠.
그분은 아들을 절대로 과잉보호하지 않았고, 아들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키웠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어야만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방과 후에는 자신의 회사 빌딩에서 화장실을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화장실을 고무장갑을 끼고 깨끗하게 치우는 일을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일이 끝나면 한달에 한번 월급을 주었습니다.
아들이 경리과에서 월급을 제대로 받아 가지고 가는 일도 중요한 수업의 일부였습니다. 화장실을 치우고 받는 얼마 안되는 돈이었지만, 돈을 제대로 세고 계산하는 일은 고등학생이 다 된 아들에게 아직도 힘든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이들을 모아 아파트를 얻어 그들을 위해 사회의 기본적인 규범들을 수도 없이 가르치기를 반복하며 그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일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부모가 없어도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강인하게 키우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눈물겨웠습니다.
지금도 마지막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학교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 속에 눈물을 감추며 울먹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은 내가 있어서 이렇게 뒤에서 돌봐 주고 있지만.... 내가 죽으면 저애가 어떻게 될 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며 말을 잇지 못했죠.
그러면서 죽은 뒤는 고사하고 "지금도 투명하게 변하는 약이 있으면 먹고 따라 다니고 싶어요. 저 애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정말 저 애를 위해주는 진짜 친구는 누구인지... 무슨 일이 저 애에게 벌어지는지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라고 말하며 담배 연기를 길게 품어내던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전 생각했지요. 바로 저 마음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고 가는 심정이....
투명하게 변하는 약이 있다면 먹고서라도 쫓아다니며 보호해주고 싶은 심정. 그것이 바로 당신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현존의 양식으로 제자들에게 돌아오시는 방식.... 성령으로 오시는 방식이지요.
바로 예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성령은 바로 그분 자신의 또 다른 현존 양식인 것입니다. 이젠 시 공간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서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방식.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다 해도 슬퍼할 것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 예화를 들며 이 부분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맨 앞에 계신 곱디 고운 할머니께서(70 이 넘으셨으나 언제나 품위있고 조용한 분이셨죠) 책상에 엎드려 계셨죠.
그분이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으므로... 나중에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분의 아드님이 바로 그런 형편이어서... 조용히 엎드려 울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얘길 듣고 괜시리 죄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죠. 나중에... 거의 일년 쯤 후에, 그 자매님 집에 식사초대를 받고 가게 되었죠. 아주 부유한 집이었고, 가지고 계신 달란트가 하나 둘이 아닌 분이셨죠. 소위 행복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것 같은 분이셨으나 제가 보기엔 그 조건들 보다는 바로 그 아드님 때문에 그처럼 겸손할 수 있고, 사랑과 자애가 가득 넘치실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쩜 그 아드님은 그 자매님에게는 엄청난 아픔과 고통을 준 자녀일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론 주님의 축복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민망하게 자꾸 들었습니다. 물론 입으로 내 본 이야기는 아니지요.
어떻든 그 날 강의를 들은 분들 중, 그 자매님은 누구보다 복음의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였고, 바로 옆에 계신 안보이는 협조자 성령을 누구보다 가까이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이 대목이 나오면 TV 의 그 아버지와 고왔던 자매님이 꼭 생각나네요.
남겨두고 가기에 너무나 마음 안 놓이는 부실한 자녀들. 늘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챙겨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오늘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