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연중11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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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2-06-17 | 조회수1,796 | 추천수22 | 반대(0) 신고 |
대망의 월드컵 16강 진출... 지나 한 주간은 참으로 흥분과 감격의 시간이었습니다. "필승 코리아" 함성 속에 온 민족이 하나되는 감격, 모두가 십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간, 기쁨과 감격 속에서 절망과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선거 사상 유래가 없는 48% 투표율을 기록했던 지방 선거, 월드컵의 열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운동장을 누리는 선수들과 감독, 코칭 스태프에게 쏟아지는 그칠 줄 모르는 갈채와 정치인들을 향한 냉대와 무관심, 지금 우리나라의 두 가지 단면입니다. 똑같은 이 시대, 이 나라 안에서 살아가면서 한쪽은 거의 신격화되었고, 다른 한쪽은 철저히 내쳐졌습니다. 작은 운동 경기 하나가 온 국민을 결집시키는 힘을 경탄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온 국민을 책임져야 할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곤두박질치는 현실에 고개를 젖게 됩니다.
어제 밤, 기쁨과 흥분 속에서도 차분한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밖에서 들여오는 함성과 경적 소리를 들으며 도대체 무엇이 모든 이를 이렇게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갈 수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단순히 '조 1위로 월드컵 16강 진출'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동안 숨막힌 현실, 살 맛 잃은 세상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찾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더 열광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은 씁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요.
'이렇게 좋아하고 감격적인 순간을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련하지 못했을까? 참으로 기쁨과 희망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 이 감격적인 순간의 한 가운데 우뚝 선 태극전사들의 자리에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나친 생각,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 믿는 이들이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하고, 슬픈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고, 아픈 이들의 치유자가 되어야 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런 선수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제로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긴 듯한 느낌에 묘한 질투심과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스포츠는 스포츠고, 종교는 종교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성당 안에서만 신자이고 성당을 나서면 믿지 않는 이와 똑같아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성당 안에서 감사와 찬미의 미사를 봉헌하는 까닭은 살 맛 나는 세상, 주님의 나라를 온 누리에 선포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을 당신 품으로 부르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당신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졌던 제자들은 이제 험한 세상 한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해야 합니다. 썩어 문드러진 세상에 새 살을 돋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추한 상처를 우리 입으로 핥아 닦아주어야 합니다. 기쁨과 희망으로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사회봉사단체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해 정당을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법이나 제도, 그 밖의 눈에 보이는 그 무엇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12사도가 그랬고, 2000년 교회 역사 안에 살아 숨쉰 많은 이들이 그랬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오늘 이 성당으로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무엇을 망설입니까? 주님의 사도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습니까?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자랑스런 태극 전사들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당당하게 해 주었습니다. 월드컵 16강전 아니 8강전 그리고 그 너머까지 잘 해 줄 것입니다. 이미 자신들이 할 바를 충실히 해 왔고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잠시 뿐입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지나면 오늘의 이 감격과 흥분은 희미해지고, 현실 안에서 주어지는 어려움에 힘겨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외로운 이가 나에게서 누군가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어깨가 축 늘어진 이가 나를 보면서 삶의 활기를 찾을 수 있도록, 절망에 허덕이는 이가 나를 통해 희망을 볼 수 있도록, 슬픔에 빠진 이가 나를 보고 환한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이제 그리스도인인 내가,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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