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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엇을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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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선영 쪽지 캡슐 작성일2002-07-04 조회수1,954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새삼스러이 기억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물론 그 분은 저뿐 만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에게 공정하신 분이셨지요.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서 조금 의아해 했어요.

도무지 호출될 이유가 없었고 워낙 숫기가 없어서 누구와도 다툼은 커녕 궁시렁 거림도 없었는데..(반에서 개별적으로 상담을 받는 반친구가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그러나 뜻밖에도

선생님 당신이 개입치 않고서는 저 혼자 도저히 누구와도 사귀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드셨는지 성격도 제 각각인 6명을 팀으로 짜 주시며 숙제를

내 주셨어요.  우리가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택하든, 봉사활동을 하든 아니면 종교적모임도 좋을 거라는 말씀이셨어요...

마침 성당을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의 안내로 가까운 성당을 다니기로 했지요... 그러나 지독히도 봉건적이시고 냉혹하리만큼 엄하시기만 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낸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도 다니고 싶었고, 독서실에서 책도 읽고 싶었고, 친구들이 저들끼리 조를 짜고 메뉴를 정하는등 수선을 떨며 캠핑을 계획하는 대성리도 가고 싶었고 아니면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도 싶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요일에 성당갈 수 있도록 아버지가 외출하시길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죠!  그렇게 조마 조마하게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켜가면서 친구들과도 유대감을 느끼며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저 자신이 놀랍도록 변화되는 것이였어요. 후에 내가 번민에 휩싸여 좌충우돌할 적 언니가 그러더군요. 저의 그 때의 모습이 너무도 그립다며.. 동생이지만 더없이 미더워보였고 나중에 자기도 성당을 다녀야 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었답니다.

  사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혈육보다 지혜로운 이에게서 받는 배려가 훨~ 감동적이고 파장이 큽니다.  

누군가가 내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것입니다.  

그저 간신히 책가방 챙겨서 풀없이 맥없이 왔다리 갔다리 하던 학창시절이 역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시험이 두렵지도 않았고, 치르는 것마다 레벨을 지킬 수 있었지요.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마디 정식으로 못 드렸던 저였지만,

학생이 성적만큼 솔직히 드러날 것이 있겠습니까! 침착하시고 찬찬히 배려하시는 분이시라 뒤에서 그 성과를 뿌듯해 하셨으리라 믿었죠.

하지만 아직도 그때 한마디 고마움도 표시하지 못한 것이 걸려 있습니다.

성적은 부뚜막에라도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므로써 얻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어필하는 표현력은 미개지역인채로 였으니까요......

 

  살다가 사시다가 한 두번쯤은 자신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고약한 지경에 놓일 위험이 있지요.  특히나 이 시대에는....

그러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언행이 아니면 자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나 어떤 공동체나 수행을 하는 분들 조차도 예외는 아닙니다.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곁에서 괴로움에 빠져있슴을 느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자세로 모색해야 합니다. 어느 구역이든 그의 고통을 시작으로 점차 파문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입니다.

마더 데레사님도 그러셨지요. 자신에 대한 지식은 자만심을 막아주는 파수꾼이 될뿐만 아니라 특히 당신이 유혹을 받게 될 때 요긴하며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너무나 강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누군가가 열변을 토할 때, 아니면 지옥의 묵시록처럼 속삭질을 할 때

과연 이것이 파멸의 말이지, 소생의 말인지, 어디를 향하는 부추김인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 일수록 당장 유익이 되는 것같음에 동조하므로써  건이 잡히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더없이 안전하게 느끼고 더불어 발전할 수 있을거 같은 쪽으로

중론이 모아져 결정지을 때는 훗날을 생각하여 반드시 건이 잡히는 일은

피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이유가 모든 이에게 어필되어야 하기에 훗날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또 한가지의 이유가 됩니다.   어제까지의 친구가 은사가 형제가 이웃이 오늘은 원수의 자리로 바뀌는 현상이 어떻게 진보를 향한 발판이 될 수 있습니까?  물론 변화되는 과정이라 한다 해도 당하는 쪽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치열히 살아야 하는 현장에서의 긴장감이나 경쟁이 없을 수는 없고,

인간이기에 저들에게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며 안간힘을 썼겠죠.    물론 그런 것을 탓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이고 희생을 동반하지 않은 발전이 없었다고 하면요.~

단지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시키면서 새로운 천년, 새시대의 준비,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만다는 이기심이 조장되는 것이 묵과되고 있는 것인지...그런 배경의 원조가 몹시도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귓전에나 들리겠나, 이제 무엇을 기대하기가 늦어서 보람없는 실패한 모습의 불평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터인데 무슨 비아냥을 덤으로 받으려는 것인가 하는 우려도 있지만,

  내일에 세상 전부를 갖고 설령 하느님의 자리조차 교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될지라도 성서에 씌여진 대로 여기 저기서 자신이 전지전능 하신 하느님이라고 우후죽순 처럼 나타난다 해도

자신의 믿음으로 눈앞에서 홀리는 기적에  대해서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영혼조차 팔아 버리는 비천한 껍데기는 되고 싶지 않겠지요..

생각의 차이라고, 어느 신부님의 성가처럼 나는 나일뿐, 단지 나일뿐, 나를 대신할 그 누구도 없다는...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에 대해 맞바꿀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시는,,,,,

저 또한 그런 생각은’ 더이상은..’이라는 한계상황에서 나 스스로를 조정키 위히서, 달래고

위안 받으려 한없이 뇌까려준 화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사람을 위한 과학이어야 합니다.

물론 엄청난 댓가와 희생을 치루었다 해도(남의 희생이 따랐을 지라도 저들의 관념은 자신들이 피터지도록 경쟁한 결과물로 여길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명줄을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권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구름이라 해서 모두가 비를 품은 구름이 아니듯이....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거머쥐었을 때 얼마나 인간적인 면이 지속될 수 있느냐인 것입니다.   물론 주위의 나뉘인 세력들의 압박이 그럴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아!~ 저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직 모를 뿐입니다.

제가 겪는 이 모든 것이 동 떨어진 세계의 일로 치부되어

차별이라는 암에 덕지" 덕지" 바세린을 덧발러서 썩혀 없애 버릴 것으로

외면하고 게으치 않아도 된다는 듯 마치 저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따놓은 사람처럼 행동함의 배경은 과연 누구입니까? 저에게는 십년이 훠얼 넘은 고뇌의 과정을 통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방치되어지고 있는 사람들 자체일 뿐더러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상상조차 끔찍하시겠지만, 진보적인 여유있는 웃음 뒤에 두 주먹(?)을 불끈 쥔 협박에 다름 아닙니다.   -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는 물음이 나와야 되겠지요.-

입장 바꿔 당신이라면 어쩌겠습니까!  아직도 거론 되어지지 않고

문제화 시키지도 않으면서 뒤에서 짓밟히고 있는 인권에 대해 관심조차

가질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이도 있겠지요! 그런 사람의 가치는 누구에게 인증 절차를 밟는것이지..속내는 자신은 예외이리라 하는 간특함 이겠지요.  

 

하나가 하나가 아닌 전체를 향한 시작이듯이... 또 어느곳에서 이런 피해를 인지조차 못하고 살고 있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간은 저의 개인사로 여겨 오히려 제 쪽에서 사람들의 개입됨을 막으려고 진저리를 치며 주위를 정리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제, 친척, 친구  그 누가되든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기대와는 배반되게 사회 전반적으로 손바닥 뒤집듯이 가해자 피해자가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어

감을 느끼며 점차 절망감으로 빠져들었었죠.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정식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해결을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지만,

(방해공작으로 그것이 가능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작년 가을이였어요.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정 사람에 대해 연민을 가지면은 무서움 조차 뒤전이라는 것을 이모부의

임종을 지켜보며 체험했습니다.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저도 모르게 자리잡아 기피하는 현상이  있는데다 이모부의 여자를 업신여기고 깔보는 듯한 면이, 형식적인 권위주의가 편치 않아 왕래를 안하는 편이었는데 거기다 이모님이 다단계판매를 하시며 수시로 채근을 하셨지만 섞여지지가 않을 것이 너무도 뻔한 일이고 어느 무리에서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떠나도록 다양한 방법을 씁니다, 더군다나 인맥사업이거늘.. 저를 위한다고 해도 문제를 아시지도 못하지만 간간히 흘리는 말들에 대해서는 과민반응

쯤으로 여기셔서 할 수 없이 한 번씩 불려 갈 때마다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절망감에 휘청여야 해는지 모르시는 겁니다.  나중에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 여기고 정말 이모 마음에 상처가 남도록 심하게 표현했지요. 마음은 조금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얼마의 돈을 버는 것이 문제입니까? 내게는 태산같은 철옹성 같은 이 문제를 해결치 않으면 길은 빗장이 질러진채 꿈쩍도 안하는데.. 후에

이모부의 노여워하시는 표정을 보고 그때 조금만 더 참아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으면 여직 수시로 불러내려는 이모님과 입씨름을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지금은 그만 두셨지만)

아뭏든 이모부는 동생분과 성묘가시다 차가 뒤집혀서 그 후유증으로 중풍같은 병상을 치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내게서 정이 떨어져 나를 찾지 않으시다가 그날은 정말 곧 돌아가실 거

같으므로 도움을 청하신 겁니다.  남에게서 받은 상처 못지 않게 스스로를 강팍하게 만들어서 견디려 했기에 이모부나 이모님의 힘든 현실에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지요.

그러나 곁에 가까이 다가서기도 멈칫거렸던 내게 이모부가 누워서 고스란

히 받았던 소위 "자신을 막 다루는 듯한 느낌에 그가 가고나면 정신적인

충격으로 몹시 괴로워하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장막이 걷혀지듯 사람에 대한 편견(남자에 대한 거리감)이 깨지는 순간이었지요.

아마 이것을 불교에서 깨달음의 "할"하는 순간이라 할지도 모를겠슴니다.

젼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시는 분과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고

더이상 꺼림찍함도 거리감도 무서움도 두려움도 내게는 없었습니다.

입으로 소리내어 주님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결코 이순간에 혼자라는 그런 절망감이 끼여들지 않도록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드렸지요. 마비된 팔다리를 주무른다고 시원이나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연민이 전해졌는지..

한마디 말도, 시원스런 표정도 못 지으시지만 느끼시는 것같았죠!

이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최후의 순간까지도 마음을 산사람처럼

예우햬 드려야 한다는 깨우침이 들었습니다.   "이 양반이 복은 있는 분이 구먼!. 조카라고 언제 한번 따듯한 말 한마디 한 적 없는데 돌아가시면서 사랑을 듬뿍 받고 편안히 가시네"하셨다.

마음을 열려고 진심으로 하면 상대가 내게 무엇을 주었던, 무엇을 뺴았

았든 별 다름이 없슴을...

이래서 예수님은 모든 계율위에 ’사랑’을 놓으셨고,

달라이 라마는 연민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셨는가 보다.  

어렸을 적에 홍수때 뚝에서 놀다가 빠져서 익사한 퉁퉁 불은 시체는 보았어도, 이 양반이 하며 외치는 엄마의 찢기는 소리를 듣고 안방으로

뛰어 가 아버지의 깊게 내뿜는 호흡을 들었어도  이렇게 손끝 발끝부터

자주빛으로 죽음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 보았지만, 육신이야 호흡이 끊기면

썩어 액체가 되어 흙이되어 자연속으로 돌아갈 것인데 눈 앞의 현상이 뭐

그리 대수랴!

 

어느 신부님이 잠깐 말씀하시는 교리중에 고해성사가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사함받고 , 주기도문, 사도신경등 기도문을 몇 번 외우는 것으로

사함을 다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 고백에 대해서 화해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은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필요한 말씀인지...

(죄를 고백해서 먼지를 털어내듯 후련함을 느끼면서도

아직 그 유혹의 조리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이기심에 대해서////////)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의 빈곤한 내면으로  황사속에 흙먼지는 산을 이루었지만,

그 산에 이제 물도 주고 나무도 심고 싶습니다.(가능하다면-)

 

엉킨 실타래에서 실꼭지를 찾아내어 술~ 술~ 풀어내고 싶도록

세상과 화해하고 싶다는 남아 있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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