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부님은 어디 계신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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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2-07-15 | 조회수2,716 | 추천수34 | 반대(0) 신고 |
7월 16일 연중 제 15주간 화요일-마태오 11장 20-24절
"그 때에 예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신부님은 어디 계신겨?>
오늘 오전 저희 집에서는 후원자들을 위한 월례미사가 있었습니다. 매주 세 번째 월요일과 수요일 두 번에 걸쳐서 월례미사가 봉헌되는데, 꽤 많은 후원자들이 오십니다. 물론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할머니들이신데, 이분들에 대한 서비스로 저희 신부님들은 미사 시간 한시간 전부터 고백성사도 드립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커튼을 친다, 촛불을 켠다, 배경음악을 까는 등 분위기 마련을 위해 노력도 많이 하신다는 데, 저는 그게 무척이나 어색해서 제 사무실 소파에 마주 앉아 자연스럽게 면담식 고백성사를 집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이 생깁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제 사무실로 들어오신 한 할머니는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시다가 대뜸 하시는 말씀, "성사주실 신부님은 어디 계신겨?" "저도 신부예요!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자, 그럼 시작하실까요. 성부와..."
마지못해 제게 고백성사를 보셨지만 계속 의심이 가는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시던 할머니! 뭔가 찜찜하다는 표정이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옆 고백실에 가셔서 다른 신부님께 다시 한번 고백성사를 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옆방에서는 왠 아자씨가 고백성사를 주던데 어찌된 일이유?"
고백성사를 집전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한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아주 오래 전의 실수들, 과오들을 이미 여러 번의 고백성사를 통해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들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과거의 상처를 되살려서 자신을 괴롭히고 스스로 죄책감이 깊이 빠져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죽음으로 가던 길을 버리고 다시 하느님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일도 회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깨닫는 것 역시 회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 형사사건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피고에게 재판관이 무죄를 선고한다든지 관용을 베풀어주면서 "다시는 이런 일에 연루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방면을 선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그 재판관을 찾아가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하고 애걸복걸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고백성사를 통해 훈방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세요"라고 애걸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저지른 과오나 죄가 너무나 크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가 큰 것이어서 씻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하느님 자비 안에 해결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고백성사를 통해 한번 죄사함을 받았다면 이제 그걸로 된 것입니다. 그 죄가 아무리 부끄러운 것이고 혹은 큰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온전히 맡기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또 기억난다면 보다 정성된 봉헌이나 이웃봉사, 자선활동을 통해 갚아나가는 노력이 더욱 소중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갖은 계명과 윤리적인 틀에 가두어놓고 우리를 협박하시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 그 자체의 하느님, 우리의 지난 잘못을 결코 따지지 않는 한없이 관대하신 하느님, 그 숱한 우리의 죄와 과오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우리를 당신 품에 안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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