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편하고 가벼운 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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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7-18 | 조회수1,850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연중 제 14주간 목요일 (이사 26,1-9. 12. 16-19; 마태 11,28-30)
예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지 말고 편하고 가벼운 짐을 지라고 하신다. 무엇이 무거운 짐이고 무엇이 편하고 가벼운 짐이란 말씀인가? 유다교에서 ’멍에’의 이미지는 율법의 멍에, 계명의 멍에를 말하고 무거운 짐 역시 율법의 규정들을 말한다. (마태오 23,1-4 참조)
이렇게 율법이라 하면 무겁고 딱딱하고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율법의 규정 하나 하나를 공부해보니 당시의 이웃 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만큼 휴머니즘이 넘치는 법이었고 오히려 오늘날의 법정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상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율법들은 대부분 약자를 위한 보호법이다. 예를 들면, 밭 주인은 수확을 할 때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을 남겨야 했다. 한 번 지나간 다음 되돌아가서 가지를 샅샅이 뒤질 수는 없다.(신명 24,19-22) 이 법은 단순히 부자는 가난한 이들과 재물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노동(이삭줍기 등)을 통해 자신의 양식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존감을 잃지 않게 해주는 법이었다.
또한 채권자가 채무자의 물건을 담보로 잡을 경우에 적어도 그 집안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신명 24,10-13) 돈을 꾸려는 사람이 담보물을 가지고 나오기까지 밖에 서 있어야 한다. 그가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라서 옷 한 벌 밖에 없다면, 해질 무렵엔 반드시 덮고 잘 수 있도록 돌려주어야 한다. 고리대금업자, 채권자들에게 한없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오늘날보다도 훨씬 인본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지 않은가?
율법 하나 하나는 모두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인간 사랑에 기초하여,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다른 민족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로 여기며 율법을 잘 준수하는 것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위대하고 숭고한 이상을 담았던 율법의 근본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누가 얼마나 조항을 지켰는가를 따지며 형제들에 대한 차별의 기준으로 악용되었으니... 613조나 되는 율법의 조항들은 결국엔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여건 속에 살고있는 약자 층에게는 더욱 삶을 힘들게 만들고 마음을 옭죄게 만드는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수께서는 그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렇다면 율법의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전혀 아니다.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하셨지만 실제로 그럴까? 산상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율법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새 ’멍에’를 비교해볼 때, 예수님의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순된 말씀 아닌가?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고통과 괴로움도 우리를 가로막는 어떠한 장벽도 쉽사리 해낼 때가 있다. 또한 아무리 쉽고 간단한 일이라도 손가락 까딱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기적과 같은 힘이 솟아나 무겁고 힘든 짐을 번쩍 들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우리의 행동을 비교해보라. 오늘 독서에도 나와있듯이 아기를 낳는 어머니는 죽을 듯이 고통스 럽던 진통을 거치고도 아기를 보는 순간, 모두 다 잊고 또 다시 아기를 낳을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볍고 편한 짐, 그것은 결코 그 짐의 크기와 무게에 있지 않다. 그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613조의 조항도 그보다 더 한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도 자연적인 사랑이 우러나와 율법에서 요구하시는 바를 수월하게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멍에란 무법이 아니라 초법이다. 아무 율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 방임이 아니라 율법의 계율을 초월한 사랑의 법을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아, 내 마음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한, 짐의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가볍고 편한 짐을 지고, 그 안에 쉬는 듯 평화롭게 안식을 취할 수 있으련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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