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결혼 13주년이면...(9/4)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반영억 신부님_성전을 지킵시다 | |||
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2-09-04 | 조회수4,286 | 추천수44 | 반대(0) 신고 |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1고린 3,6-7)
<결혼 13주년이면...>
결혼한 지 13주년을 맞이한다면 어떤 상태에 있을까? 나의 사제서품 13주년을 맞이하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만일 내가 결혼을 했더라면 처녀 때는 꽤 이뻤는데 이제는 막나가는 아줌마가 된 마누라와 중학교 들어갈까 말까한 이쁜 딸내미와 운이 좋았다면 개구장이 티를 막 벗어난 장난꾸러기 아들내미 하나쯤 잊지 않을까? 나는 아마도 평범한 직장의 샐러리맨이 되어 있을테고 자칫 어설프게 나가다간 짤릴 위험도 있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면서도 자식들 커가는 재미로 힘듦을 잊으며 살고 있겠지.
신앙생활은 그렇게 열심하지는 않을 것같고 그래도 나름대로 성가정을 가꾸기 위해 주일미사는 가능한 한 가려고 노력할거야. 마누라 눈치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품 때의 사진을 한번 쳐다보니 참으로 멋있게(?) 보인다. 젊고 부드럽고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어쩜 히끗히끗한 머리와 살이 붙어 약간 능물스러워진 얼굴하며 축처져가는 뱃살의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서품 13년, 나도 이렇게 달라져 있구나. 결혼생활을 했더라면 총각 때의 수많던 꿈을 접고 그냥 평범한 가정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듯이 어쩌면 사제생활 13년도 그런 것 같구나. 나름대로 멋진 꿈을 꾸었던 서품 때 지금은 별로 결실도 맺은 것 없이 이렇게 평범한 삶으로 만족하고 있구나. 헌데 결혼했으면 자식들이라도 보고 낙을 삼을텐데 사제로서 나는 그나마 결실도 없으니 이럴 어쩐다!!!
아침 일찍 목욕재계하고 아침기도와 미사를 하며 다시한번 조용히 그분과 맺은 인연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소박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본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바오로야, 걱정말아라. 결실은 니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이다. 너는 일꾼으로 너의 몫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나의 몫이란다."
그래 그런 토끼같은 자식들이 없으면 어떠냐? 결실을 얻고자 애쓰지 말고 씨를 뿌리는데 주력하자. 나는 조용히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되자. 홍수 때문에 결실을 하나도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쩌겠는가? 가뭄 때문에 결실을 하나도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쩌겠나? 거기에 연연해 하지 말고 내 몫은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묵묵히 씨를 뿌리는 것임을 잊지 말자.
복음을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바오로야, 내가 시몬의 장모를 고쳐준 것처럼 그리고 나를 찾아오는 병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모두 고쳐준 것처럼, 너 또한 측은지심을 갖고 너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이 손을 얹어 주어라. 무엇보다도 병들고 상처입은 영혼들을 말이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마음 뿐이지 않던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인 것 같다. 측은지심 말이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지 않은가!
다음 14주년에는 머리는 더 히끗해지고 뱃살은 더 쳐진다해도 내 마음만큼은 더 맑고 새로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주님! 부족한 저를 선택하셔서 후회스럽지는 않으신지요? 당신이 불러주신 삶, 그저 당신을 위해 일하는 작은 도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겠습니다. 저를 사랑하시기에 늘 저를 새로이 가르치소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