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도자는 이러해야(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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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2-11-03 | 조회수1,715 | 추천수24 | 반대(0) 신고 |
오늘 복음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시면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겸손과 봉사를 촉구하시는 내용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상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는 비단 교회 공동체만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 수도 공동체, 직장 공동체, 국가 공동체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내용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일 것이다.
가장 먼저 예수님이 당시 지도자들인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지적하시는 것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은 틀리지 않았는데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말씀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행동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가정에서 <공부하라, 공부해야만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강변하는 것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만, 자식에게는 공부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은 권위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조용히 독서를 하고 성서를 읽고 신문을 보고 공부를 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줄 때 자녀들은 공부가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될것이다. 공부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공부하지 않는 부모들을 참으로 많이 목격하게 된다. 훌륭한 신자는 성당에 열심히 나오고 열심히 묵주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러 다니기 이전에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을 더 잘 알고 이해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남에게 짐을 지우기 이전에 자신이 그 짐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님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지적하시는 점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한다는 점이다. 마태오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 기도, 단식하는 위선을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이제 성구갑과 옷단의 술을 확대하는 위선을 규탄한다. 즉 외적으로 보이려는 데만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하는 자선행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는 기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아닌가? 우리가 하는 단식과 고행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행하는 전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입고 있는 수도복이나 묵주, 타우목걸이 등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참으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모든 일을 행하게 될 때 우리는 참 지도가 될 수 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지적하시는 점은 그들은 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애쓴다는 점이다. 항상 윗사람으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것, 남들로부터 랍비라 불리기를 즐겨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선생이라 불리지 말고 형제라 부르기를 원한다. 그리고 아버지(신부, 사부)라 불리지 말라고도 한다. 오늘날 사제를 신부(Father), 즉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나로서는 참으로 못마땅하다. 이 직함 자체가 사제들을 주님의 봉사자요 종이 아니라 오히려 높은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성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서로를 형제라 부르라고 했고 더 낮은 사람임을 명심하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라 부르도록 했다. 오늘날 교회와 수도공동체, 가정과 직장 공동체는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봉사자들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지도자의 자질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사람(언행일치). 둘째,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 셋째, 자신을 낮추는 사람(겸손).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의 참 제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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