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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도자...(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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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우진 쪽지 캡슐 작성일2002-12-02 조회수2,356 추천수27 반대(0) 신고

예전에 나이 많으신 고참 신부님으로 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우리 수도회 총장님(E. Vigano)께서는

우리 회원들이 수도자(Religious)라는 말을 쓰는 것을 싫어하셨단다.

왠지 그 말속에 트라피스트 수도원, 시토회, 카르투시오회, 베네딕토회 등등의

수도승(Monk)의 삶과 같은 느낌이 베여있기 때문이란다.

그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우리 회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근대 교회 역사 안에서 생겨난 대부분의 수도회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른 면을 띠기도 하는 것이만

우리 회는 창립자이신 돈보스코 성인이 자신의 일(청소년 구원)을

도와줄 이들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이 수도 서원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 예방 교육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수도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관점은 역사적 관점이고 , 우선적으로 성령의 감도가 있었으리라.

어쨌든 수도회를 창립하고 사도직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사도직 안에서 수도 생활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 우리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수도생활에 대한 신학이 요구되었던 것이고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 이들이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무척이나 일을 중요시 하나보다.

그래서 그 총장님은 그럼 우리 수도회 회원들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활동안의 관상가"라는 말을 쓰셨단다.

 

그렇다면 수도승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막 교부이신 파네피스의 요셉압바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누가 수도승이냐?" 라는 질문에

"날마다 내가 누구냐고 질문하면서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사실, 수도자로 살던, 수도승으로 살던,

자신의 신원에 대한 물음을 평생 계속되어야 할 일이고,

그에 대한 적용은 단지 수도자에게만, 수도승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향하고, 삶의 의미로 선택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 하나 뿐이기에 그렇다.

그런 공통의 의미를 잃었을 때

수도자이든 아니든, 수도승이든 아니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과는 관계가 없는

자신만의 신앙 생활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복음안에서 자신의 종을 치유해주시기를 예수님께 부탁하는

백인 대장을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의 겸손함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해였고,

그 사람의 용기를 자신의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기 보다

그 처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용기였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수도 생활을 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내가 나의 삶의 목표, 이상, 의미로 추구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질문들은 오늘 만이 아닌 우리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거기서 우리의 신앙이, 겸손함이, 용기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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