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사님, 어찌 그리 농담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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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2-12-19 | 조회수2,051 | 추천수25 | 반대(0) 신고 |
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루가 1장 5-25절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천사님, 어찌 그리 농담을>
가끔씩 같이 사는 아이들이 세미나다 캠프다 해서 2-3일씩 밖으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조용해서 좋고 또 홀가분한 마음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마음이 허전하고 썰렁한지 모릅니다. 그러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면 아이들 얼굴이 하나 하나 떠오르면서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됩니다. 아이들이 저희에게 주는 기쁨이나 보람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아이들 없는 살레시오 회원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합니다.
남남으로 만난 저희들도 이런데, 친부모자식간의 애정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그토록 헌신하고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은 부모의 존재이유요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자랑이며 기쁨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이며 미래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밤늦도록 뛰어다니며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결혼한 후 20대 30대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참을 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 사십이 넘어가고 오십이 지나면서 문제는 심각해졌습니다.
이웃집 부부들은 이제 다들 둘씩 셋씩 많은 집안에서는 열둘 씩 낳은 자식들이 장성해서 대가족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슬슬 비교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웃집은 명절 때마다 아들들, 손자손녀들까지 해서 100여명이 넘는 대가족이 모여 지지고 볶고 온 집안이 야단법석인데, 즈가리야네 집은 한마디로 "왕썰렁" 그 자체였습니다. 쥐죽은듯이 조용합니다. 웃을 일도 화젯거리도 전혀 없습니다. 오직 두 노부부만이 매일 서로 얼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후손, 특히 아들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후손들이 많다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후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습니다.
즈가리야는 젊은 시절부터 흠 없이 살아온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즈가리야는 성전 봉사에도 충실하면서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던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자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70을 넘긴 즈가리야는 단 한 명의 후손도 허락하지 않으신 하느님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 나이에 더 이상 뭘 바라겠어?" 하면서 자식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 완전히 체념한 상태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시켜 "아들을 낳을테니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고 전합니다.
그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즈가리야의 첫 반응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님, 보십시오. 저승꽃이 사정없이 피어난 이 나이에 아들이라뇨? 어이가 없네. 이 나이에 아들이라! 지나가는 개들이 웃겠네. 천사님은 어찌 그리 농담도 잘 하시네." 하며 전혀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만사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적인 시각, 인간적인 의식구조로 볼 때 100%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단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심연의 바닥에까지 우리를 내려보내셨다가 거기서부터 우리에 대한 재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진한 바닥 체험을 한 우리와 함께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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