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단 하루를 살더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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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3-01-21 | 조회수2,299 | 추천수25 | 반대(0) 신고 |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마르코 2장 23-28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오늘 기억하는 순교 성녀 아녜스의 생애를 통해 저는 한가지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군인들이 자주 쓰는 은어 "짬밥"이나 나이, "세례 받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하는 것들과는 무관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보다 신앙은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깊이 투신하는가?", "얼마나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는 듯 합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온 몸을 다 바쳐 살아가려는 노력, 이리저리 한눈 팔지 말고 단 한 분만을 향해 열렬히 사랑하는 것, 거기에서 신앙의 깊이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확" 눈에 띄는 빼어난 미모를 지녔었던 아녜스 성녀는 놀랍게도 하느님께만 마음이 방향 지워져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는 거머리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으며 청혼을 거듭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 다니느라 숱한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듭 "차임"으로 인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청혼자들은 한가지 비밀을 알게 됩니다. 아녜스가 당국에서 금지한 종교인 그리스도교 신자였다는 비밀 말입니다.
체포되어 원수들의 법정에 선 아녜스를 배교시키기 위해 관리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녜스는 처형시키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 12세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12세의 나이의 소녀들을...그 나이의 소녀들은 전혀 개념 없는 아이들, 통제가 불가능한 아이들, 부모님의 성난 얼굴조차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 실수로 바늘에 한번 찔리기만 해도 난리가 난 것처럼 행동하는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아녜스의 어린 몸에 상처를 입을 자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칼을 받을 자리마저 없었던 아녜스는 그 칼을 이겨낼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녜스는 고통받기에 아직 너무 어렸으나 승리를 얻을만큼 이미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강제로 신전의 제단에 끌려 나아가 불 가운데 놓여졌을 때, 아녜스는 그리스도께로 손을 펼쳐 그 불경한 제단 위에서 주님이 거두신 승리의 표시를 나타냈습니다.
아녜스는 댕기 머리 대신에 그리스도로, 화관 대신에 자신의 덕행으로 머리를 단장했습니다.
모든 이가 울고 있었지만 아녜스만은 울지 않았습니다.
아녜스는 자신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로 인한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행복하게 여겼습니다. 죽음의 칼날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그분께로 가는 지름길로 여기고 즐거워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아녜스는 마치도 사랑하는 신랑을 맞이하러 걸어가듯 두 팔을 벌리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언제나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가나이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 "동정녀들에게"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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