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개들과 경쟁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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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3-03-19 | 조회수3,806 | 추천수44 | 반대(0) 신고 |
3월 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루가 16장 19-31절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개들과 경쟁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이 세상에서 겪었던 불행과 고통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식사 때 음식으로 인해 지저분해진 손을 닦기 위해 냅킨대용으로 빵을 사용했습니다. 손을 닦는데 사용된 빵 조각들은 탁자 밑으로 버려지곤 했는데, 라자로란 거지는 그 빵 부스러기를 모아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더욱 못 견딜 일은 탁자 밑으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받아먹는 것조차 개들과 경쟁을 해야했습니다.
라자로의 삶은 한마디로 인간의 삶이 아니라 짐승의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라자로를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개처럼 여겼습니다. 라자로가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 견뎌내야 했던 굴욕감과 비참함은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라자로에게 있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라자로가 겪었던 처참함을 묵상하면서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난데없는 고통 앞에서 대체로 이런 넋두리를 합니다.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왜 내가 저 원수를 만나 이 고생인가?" "왜 나만 이렇게 휠체어에 앉아 평생을 보내야 하는가?"며 하소연을 합니다.
참으로 고통은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도 우리와 똑같은 넋두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가족들과도 생이별을 해야했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심한 피부병에 걸렸던 욥은 너무나 간지러운 나머지 기왓장 조각으로 가려운 부위를 긁어댔습니다.
욥은 분노에 찬 나머지 "어찌하여 고달픈 자에게 빛을 주시며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 3, 20) 하고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고통과 삶은 따로 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그 무엇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덤 안에 누워있는 사람만 빼고 그 누구든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고통에 압도되어 살아가는가? 아니면 나름대로 고통거리들을 해결해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고통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밥을 안 먹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마다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 좋겠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나를 성숙시키고 단련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이 고통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드는가?"하는 질문 말입니다. 결국 고통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우리에게 크나큰 고통이 지워집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정말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고통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 그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비록 참아내기 힘든 것이지만 우리가 끝까지 잘 견딜 때 한 단계 높은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켜 당신의 사명을 실천할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보내십니다. 이 고통이야말로 하느님 편에서 보내시는 가장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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