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의인{義認}과 성화{聖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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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은표순 | 작성일2003-04-12 | 조회수1,38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의인{義認}과 성화{聖化} ☜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믿음으로써 神 앞에서의 義로 인정받는 것을 통상 의인 {義認, justification}이라고 한다. 義로 여겨지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神의『거룩함』 {聖}에 참여하는 것을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한다. 의인{義認}만의 신앙은 관 념적인『머리』{頭} 만의 신앙이 되고, 반대로 의인{義認}을 생각지 않고 단지 성화 {聖化}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신앙에 의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노력 수양에 의해 서 거룩{聖}하게 되려는 도덕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두 가지를 다 강조하는 복음 {福音}의 진리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그래서 기쁨이 없는 죽은 신앙의 형해{形骸}로 나 아가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구체적인 신앙생활은 의인과 성화의 양면을 다 같이 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書}와 갈라디아{書}에서 신앙에 의한 의인을강조했으나 다시 필{筆}을 들어 신앙에 사는 사람의 전생활{全生活}이 神께 봉헌되고 거룩{聖}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완전히 거룩한 사람 이 됩시다.』{2고린 7: 1.}
우리가 의인과 성화의 양면을 신앙생활에 있어서 잘 살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기도』 이고『바람』일 것이다. 의인과 성화는 일단 구별되지만 그것은『하나』인 것이다. 우리 는 그것의 어느쪽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양면의 균 형인 것이다. 진리는 어디까지나 중용{中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聖書}의『가르 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화에까지 이르지 않는 의인은 참 의인이 아니며 동시에 의인으로부터 이탈한 성화는 단지 업{業}의 의에 불과한 것이다. 십자가{十字架}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밑바탕』에 대한 자각{自覺}에서부터 이제 인간이 성화를 지 향하면서 살아가고 복음의『빛』으로 다시 조명된 채, 새『삶』이 영위되어야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생활이다.
불민{不敏}한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영혼의 오저{奧底}속에 의인의 성화가 둘{二}이면 서『하나』{一}임을 아무런 무리[無理}없이 깊이 지실{知悉}하게 됨을 참으로 기쁘게 생 각한다『15분{分}마다 의인 속에 서{立}있는 것, 그것이 성화{聖化이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지만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가 근대인과 함께 사람이 의인과 성화에 참여하는 주체{主體}로서 막연한 하나의 인격 {人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터득하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있는 신앙은 영혼의 오저{奧底}에서 나오는 하나의『가능성』이라는 것, 우리 안에 있는 영성{靈性}의 영{靈}인 그리스도와 결합될 때 의인과 성화가 긴밀하게 융화된다는 것을 우리는 터득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영성[靈性]이 십자기의 구속{救贖} 을 통해서 神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義로 여겨지는 것이다.
지상{地上]에 이미 왔고 지금은 영{靈}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의 부단한『교제』에 의 해서 우리는 내측{內側}의 가장 깊은『곳』으로부터 거룩{聖}학 되고 그래서 우리의 전인 격존재{全人格存在}가 점차 神의『거룩함』{聖}이 성령{聖靈}에 의해서 으리 내측{內側}으 로부터 외측[外側}으로 점차 흘러 나오게 되는데 이 과정{過程}을 우리는 聖化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인{義認}과 성화{聖化]는 결국『하나』{一}이며 그것은 수동{受動}적인 입장인 것이다
PS: 김정원 신부님 강론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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