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북음의 향기 (성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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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4-15 | 조회수1,625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 2003년4월15일(화) -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3,21-33.36-38 <너희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복음의 향기]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제2부(13장-21장)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요한복음 제1부(1장-12장)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업적을 전개(展開)하는 과정이라면, 제2부는 이 업적의 완성(完成)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제2부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마지막 말씀(13장-17장)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18장-21장)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새계명의 선포 부분(13,34-35)을 제외한 가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반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이미 가리옷 사람 유다는 예수를 배반할 자로 암시되었다. 물론 이 부분은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점에서 소급하여 언급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수님만 빼고는 다른 어떤 제자들도 유다가 배반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도 함께 자리를 하였고,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의 발도 씻어주셨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몹시 착잡한 심정으로 예언적 비밀을 폭로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13,21) 이 비밀이 폭로되자 만찬석상은 순식간에 의심과 변명의 자리로 변한다.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13,22) 사뭇 걱정스런 어투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 마태 26,22) 하고 자신 없는 반문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 중에 그런 짓을 할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루가 22,23) 하고 서로 묻기도 했다. 이미 그 전날 대사제들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 그 값으로 은전 서른 닢을 챙겨먹은 유다도(마태 26,14-15) 나서서 예수께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마태 26,25) 하고 물었다. 수제자(首弟子: 베드로)와 애제자(愛弟子: 통상 요한을 지칭함) 사이에 눈짓이 오가면서 마침내 배반자(背反者)를 색출한다. 애제자가 예수께 속삭인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예수께서 스스로 배반자를 암시적으로 지목하신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이로써 배반자는 수제자, 애제자, 예수님, 그리고 배반자 스스로의 선에서 밝혀졌다.(이 장면을 묘사한 15세기경의 그림이 있다.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콜마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틴 숀가우의 작품이다.) 이제 배반자는 더 이상 그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 스스로 유다를 밖으로 내보내신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27절)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 유다에게는 배반의 밤이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영광의 밤을 내다보시고 남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신다. 수제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유다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운명(運命)으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재수가 없는 것일까? 베드로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새계명"(34-35절) 부분이 오늘 복음에는 빠져있다고 했다. 이 부분을 원래 자리에 넣어 읽어보면, 베드로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거나 그의 생각이 한 곳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1-34절)는 부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의 문맥상 베드로는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계명("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을 흘려들은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갑작스레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36절) 하고 물으면서, ...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37절) 하고 장담한다. 결국 수제자도 걸려들었다. 예수께서는 스승을 배반할 자가 유다만이 아님을 이미 내다보고 계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닭이 울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마태 26,75; 루가 22,62) 사태가 이쯤 되면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승을 배반할 가능성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사실 바로 그날 밤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마태 26,36) 스승에 대한 제자의 신의(信義)와 충성(忠誠)은 장담(壯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行動) 속에 있음을 본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가장 큰 잘못은 회개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회개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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