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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향기 (성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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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4-16 조회수1,431 추천수3 반대(0) 신고

◎ 2003년4월16일(수) -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복음의 향기]

 

제자가 스승을 배반한다. 아니 은전 서른 닢에 제자가 스승을 대사제들에게 넘겨주기로 이미 약정을 했다.(15절) 비극(悲劇: tragedy)이다. 우리가 어제는 요한이 쓴 비극을 접했고, 오늘은 마태오가 쓴 비극을 읽는다. 성주간 화요일과 수요일에 연이어 같은 비극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요한의 기록과 마태오의 기록이 내용상 약간의 차이점은 보이고 있지만, 같은 비극을 이틀간 연달아 미사전례의 복음으로 채택한 교회의 의도가 무엇일까? 교회 전례의 의도를 두 가지 측면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1) 우선 오늘 복음이 언급하는 무교절(Mazzot)과 과월절(Pesah)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에 의하면 무교절 첫날((17절)에 제자들이 해방절 곧 과월절 음식을 준비한다(19절). 원래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의 축제"로 농경사회였던 이방인 가나안의 축제였다. 과월절은 이스라엘의 이집트탈출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니산월(유대력으로 1월) 15일에 해당한다. 유대력으로 따지자면 올해의 과월절은 유대력 5763년 니산월 15일, 우리의 달력으로는 2003년 4월 17일 목요일, 그것도 저녁 6시 이후부터이다. 역사적 출애굽 사건이 벌어진 훨씬 후에 기록된 출애굽기는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한꺼번에 묶어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즉 야훼에 의한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다.(출애 12,1-20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산월 10일에 어린양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니산월 14일, 즉 무교절 첫날, 해가 지기 전에 도살하고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여(그러니까 2003년 4월 17일 오후 2시~6시 사이), 해가 저문 뒤에(과월절인 니산월 15일의 시작) 누룩 없는 빵과 양고기를 먹음으로써 축제를 시작하였고 이 축제(무교절)는 8일간 계속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오늘 복음은 수요일에 들을 것이 아니라 목요일에 들어야 시간상의 의미에 부합한다.

문제는 "누룩 없는 빵"과 "어린양의 피"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사함을 위하여 내어줄 자신의 몸과 피를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의 의미로 부각시켜 신약의 새로운 축제를 세우시려 하신 것이다. 이로써 해방절 만찬은 제자들에게는 스승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이 되었고, 예수님에게는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의 설정이 된 셈이다.

2)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스승을 팔아 넘기는 제자 가리옷 사람 유다의 입장이다. 그도 12제자 중 하나이며,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3년간 동고동락하였다. 공관복음은 유다가 해방절 만찬이 있기 전에 대사제들에게 가서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했다(마태 26,14-16/ 오늘 복음의 도입)고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 기록을 생략하고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부을 때 유다가 제자단의 총무로서 아까워했다((요한 12,4-6)고 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해방절 만찬 식탁에 앉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21절) 하고 말문을 여셨다. 이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제각기 자기는 아닐 것이라고 반문하였다.(22절)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의 보도와 는 전혀 달리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23-24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라니 그가 과연 누구인가? 사실은 막막하다. 물론 배반자는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게된다. 예수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마태 27,3-10), 아니면 은전 서른 닢으로 땅을 샀다가 거꾸러져 배가 터지는 극도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사도 1,16-20)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누구 하나를 지목하신 것이 아니라 12명 중 누구든지 그가 될 수 있다는 의도로 배반의 가능성과 영역을 극대화시키고 계신다. 결국 제 발이 저린 유다가 걸려든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일축하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첫째는 유다가 자기는 아니라는 말이 사실과 다른 말로서 "너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둘째는 "그것이 너의 말이기는 하나 나(예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전자의 의미를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개개인의 상황에 부쳐두고, 후자의 의미에 동의하고 싶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시작부터 제자의 배반으로 침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상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겼으며, 본성상 같은 하느님으로서 완전한 자유의지로 세상 구원의 십자가 길을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람됨의 참 뜻일 것이다.◆

[예수님은 배반과 무관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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