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도와 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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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은표순 | 작성일2003-04-26 | 조회수1,23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사도와 제자 ☜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 하여 라.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 5-10}. 예수님은 전교를 시작함에서부터 신변에 12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이들에게 神의 나라의 오 의{奧義}를 가르치시며 인격적인 절차탁마{切磋啄磨}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시켰다. 『예수께서는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 13-15}. 그러나 제자들의 교육은 실패로 끝났 다. 예수께서는 제자들한테 버림을 받고, 홀로 참혹하게 십자가에 메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 다. 그러나 부끄럼 없는 형사{刑死}에 처하게 된 이들의 스승은 배반한 제자들의 죄를 구속 하고 죽음을 극복한 채, 부활하였다는 사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知}때부터 그들은 사도 {使徒}들이 되고 스승{師}은 주님이신 구세주,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복음의 전교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의『가르침』을 그저 전한 것이 아니고, 사도{使徒}들로써 새롭게 불리움을 받은 자들이 부활의 그리스도 의『생명』에 살고, 이『생명』{生命}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만일 예수꼐서 한 인간의 교사 {敎師}에 불과했다면 전교는『가르침』의 전달이기에 예수님의 생전에 있어서 처럼 사제관 계{師弟關係}를 통해서 이룩되어지는 것이 정도{正道}라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主이며 살아있는 구세주이기 때문에 사도들 또는 이들을 계승한 전도자들 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달할 중계자들이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전교 상황은 어떠한가? 대도시에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로 쇄도하는 만큼, 과연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달되고 있는가? 전교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중계라 하지만, 그것 은 기계적인 중계가 아니고 전{全}인간적인 활동이라야 하기 때문에 그 나라와 민족의 구체 적인 특성에 따라 되어져야만 한다는것은 당연하다. 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오래된 한국에서 는 복음의 전교도 일응 복음의 생명이 참으로 구체화될 만큼 그것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전교의 실제문제로써 예수님 이래의 사제 관계의 주잇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 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고하고 사제의 관계는 그리스도교의 전교에 있어서는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참으로 복음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스승에 대한 일체의 인간적인 진실 관계를 뛰어넘어서 그리스도를『진실{眞實, 아멘}한 者』로 받아들 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진실{眞實, 아멘}한 者』가 되는 것, 그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관계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정{否定}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否定}을 통과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반대로 강한 것이 되고, 진실로 복음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유교적인 이상 주의와 영웅주의와는 엄연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위 사제 관계는 언제나 다분히 이교적인 요소가 부착되어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PS:김정원 신부님 강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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