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향기 (필립보와 야고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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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5-03 | 조회수1,400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 2003년 5월 3일 (토)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의 복음] 요한 14,6-14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복음의 향기]
교회는 오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낸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니,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필립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인 베사이다 출신으로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예수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고, 나타나엘(공관복음의 바르톨로메오를 지칭함)을 예수께 인도하였다.(요한 1,43-47) 오 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에서 예수님의 첫 대화자로 등장하며(요한 6,5-7), 유다인의 명절에 예배를 드리려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그리스 출신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소개도 하였다.(요한 12,21-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도 하였다.(요한 14,8-9) 구전(口傳)에 의하면 필립보 사도는 그리스를 무대로 전교 하다가, 62년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때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형의 죽음으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오늘 필립보 사도와 나란히 축제의 주인공석에 앉은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이다.(마르 3,18) 이는 요한사도의 형제로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러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로서(갈라 1,19), 야고보 서간의 저자인지, 예루살렘 첫 사도회의를 주관하면서 이방인들의 교화(敎化)를 주장한 야고보(사도 15,13-21)와 동일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구전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필립보와 같은 해(62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 두 사도의 축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요한복음 제2부(13-21장), 즉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과 수난, 죽음, 부활에 해당되는 대목으로서 필립보 사도와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누구든지 이 대목이 오늘의 복음으로 채택된 이유가 단지 필립보 사도의 이름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소극적인 사고(思考) 안에 머물게 된다.
오늘 복음에는 토마스와 필립보 두 사도가 등장한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이제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절)는 것이다.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는 그 날 모세 앞에서의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밝히시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방법을 사용하신다.(출애 3,14; 요한 6,20) 예수께서는 "에고 에이미"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자체이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인생(人生)에 있어서 두 갈래의 길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더 나은 진리(眞理)를 위한 학문적인 탐구가 목표를 얻었으며, 생명 과학적인 노력을 기울여 그렇게 갈구하는 참 생명을 찾게 된 셈이다. 예수께서 이른바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신다기보다는 그분 자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러한 하느님 계시의 진리를 밝힐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 토마스 사도에게 참으로 감사한다.
뿐만 아니다. 토마스에 이어서 이번에는 필립보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청을 넣는다.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램이다. 즉, 토마스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상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자신을 밝히신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문(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스나 필립보 사도의 우문(愚問)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떡하겠는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시각적(視覺的) 능력을 벗어나 존재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다.(요한 1,18; 5,37; 6,46)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도들과 사도들을 계승한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봄으로써 이미 하느님을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된 자이다.(요한 21,29)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원도 감사도 찬양도 드리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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