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향기 (부활4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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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5-16 | 조회수1,40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2003년 5월 16일 (금)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복음의 향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제 곧 세상을 떠나야 함을 내다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행하셨다.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고, 서열(序列)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마땅히 섬겨야 함"을 엄중하게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세상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을 이어갈 제자들의 사명은 분명해졌다.(요한 13장)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식(告別式)이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스승을 팔아 넘기게 될 가리옷 사람 유다는 사탄의 굴레를 쓰고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 제자단의 으뜸인 베드로조차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하루 밤을 넘기기도 전에 스승을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고별식장의 분위기는 알만 하다. 여기까지가 요한복음 13장의 흐름이다.
고별식장의 삼엄한 분위기는 모두를 걱정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당장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대체 스승은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제자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너희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걱정이나 불안에 듣는 약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동시에 희망이며 신뢰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 제자들의 걱정과 불안이 제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통상 무지(無知)에서 불안과 걱정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 수 있는 설명을 덧붙이신다. 예수님의 "가심"은 잠시의 이별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 즉 하느님 나라에 모두를 위한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이별이며, 있을 곳이 마련되면 다시 와서 모두를 데려가실 때까지의 이별이다.(2-3절)
예수께서는 이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고 제자들의 "앎"(지식)을 전제하신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동반했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토마스가 나서서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 라고 반문한다. 토마스는 아직도 불안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과 "그 길"에 대한 자신의 앎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표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요, "그 길"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밝혀주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그렇다. 이 말씀은 비유법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도식을 사용한 자기계시인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지식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불식(拂拭)시키셨다. 믿음에 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은 아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음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따로 일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길이라 하십니다. 당신이 길이니 우리더러 밟고 가라는 것이지요.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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