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향기 (부활4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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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5-16 | 조회수1,309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 2003년 5월 17일 (토) -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4,7-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복음의 향기]
어제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께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절) 라는 대답으로써 토마스의 무지(無知)를 불식(拂拭)시키셨다. 무지의 불식은 동시에 불안과 걱정을 제거한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시는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고별의 저녁시간이 깊어간다. 이 틈을 놓칠세라 지칠 줄 모르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된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7절) 예수께서는 문법상 미래형(알게 될 것이다)과 현재완료형(알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완료형(이미 뵈었다)을 한꺼번에 사용하여 교수(敎授)하신다. 예수님은 고별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피부로 느끼시는 모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는 전제아래 속성법(速成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속성법의 의도가 빗나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필립보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엉뚱한 청을 넣는다.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램이다. 즉, 토마스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상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자신을 밝히신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문(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스나 필립보 사도의 우문(愚問)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난감해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필립보 사도의 소망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법도 하다.(8절)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이미 인간에게 시청(視聽)되었으며 감지(感知)되었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시각적(視覺的) 능력을 벗어나 존재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다.(요한 1,18; 5,37; 6,46) 인간은 오직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다시금 예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으며(12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며(13절),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14절)을 의미하는 말이다. ◆
[우리는 내가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하기 전에 내가 "무엇"을 청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우선 "예수님의 이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여기서 "이름"은 그분의 "뜻"을 말합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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