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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향기 (부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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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5-20 조회수1,760 추천수6 반대(0) 신고

◎ 2003년 5월 20일 (화)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4,27-31a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28)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29) 내가 지금 이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너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31)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의 향기]

 

어제 복음을 통하여 알아보았듯이 오늘 복음으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고별사는 끝난다.(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이며, 15-17장은 후에 첨가된 부분이다.) 미사전례의 복음으로 봉독되지는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b절) 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시간,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받는다.

 

어제 복음 끝에 서 있는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재림(再臨)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재림지체(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불신(不信)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우세(優勢)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에서다.◆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님의 사형선고와 죽음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좇아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음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줍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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