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통의 영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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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3-06-16 | 조회수5,191 | 추천수44 | 반대(0) 신고 |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고린토 2서 6장 1-10절
"우리는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의 영성>
요즘 계속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들이 유난히 제 가슴에 많이 와 닿습니다. 특히 고통과 시련, 슬픔, 그 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들은 제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경적소리처럼 들려옵니다.
어제 오랜만에 소년원엘 갔습니다. 그런데 어제의 하이라이트는 미사도, 강론도 아니었습니다. 자원봉사자 어머님들이 정성껏 준비해오신 간식도 아니었습니다. 한 아버님의 "마무리 한 말씀"이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보통 저희 천주교 집회시간은 그 날 오신 아버님이나 어머님을 모시고 간단한 한 말씀 듣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지요.
어제 한 말씀을 해주신 아버님은 최근에 당신이 체험하셨던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한가지 해주셨습니다.
말씀의 주인공은 아버님과 25년을 동고동락해오셨던 부인이셨습니다. 부인께서 최근에 신체의 한 부분에 악성 종양이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체적인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곳에 암 세포가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두 군데 다 초기여서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고, 잘 치료를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진단결과를 들었답니다. 그래서 요즘은 열심히 치료에 전념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항암 치료 차 입원했을 때, 2인 병실을 쓰게 되었는데, 같은 병실을 쓰게된 다른 자매님 역시 똑같은 부위에 종양이 생겨 같이 치료를 받게되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부위, 똑같은 증상, 똑같은 정도의 병에 걸린 두 사람이었는데, 두 환자가 보여준 태도는 하늘과 땅이었다고 합니다.
병실의 다른 자매님은 자신에게 다가온 병고를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길래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되는냐?"며 울부짖었답니다. 매일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면서 힘겹게 하루 하루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부인되시는 분은 정 반대였답니다. "그나마 이렇게 초기에 발견하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 드려요"라며 환한 얼굴로 병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답니다.
그리고 병 문안 오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일일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들뜬 목소리로 일찍 병이 발견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자랑을 하면서 "한번 놀러 안 올거냐?" 혼을 내기도 했답니다.
제가 소개해드린 낙천주의자 자매님을 생각하며 직접 뵙지는 않았지만 바오로 사도 못지 않은 깊은 "고통의 영성"을 지닌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고통의 표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통 이면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을 지닐 필요가 있겠습니다.
고통,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면 피할수록 고통은 더 큰 고통이 되어 우리를 압박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앞에 중요한 자세는 이왕 다가온 고통,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에 합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노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 반드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굳게 믿는 일입니다.
꿋꿋이, 그리고 의연히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을 견뎌나갈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고통은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결국은 성장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슬픔을 당해도 기뻐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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