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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남북통일 기원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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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6-25 조회수1,372 추천수6 반대(0) 신고

◎ 2003년 6월 25일 (수) - 남북 통일 기원미사

 

[오늘의 복음]  마태 18,19-22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20)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오늘은 6.25전쟁 발발 53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분단된 우리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1950년에 6월 25일에 발발한 남북전쟁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다. 나 자신도 전쟁을 직접 경험한 바는 없지만, 성신고등학교 시절 학도호국단원으로 매년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6.25기념행사에 참가했었다. 뿐만 아니라 월남전쟁 때문에 상이군인으로 살아가는 형님의 모습과, 또 그 때문에 모친께서 78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매달 군종후원회를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6.25전쟁이 결코 나와는 상관없는 강 건너 불이라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6.25전쟁의 역사, 의의, 교훈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남아 있는 상처, 분단조국과 북한의 상태, 유공자, 유가족, 이산가족 등의 문제는 배워서라도 기억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6.25전쟁이 점점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면서 역사의 한 부분을 그냥 모른다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더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 6.25 전쟁 : [다음 자료는 대한민국 국방부 제공 6.25전쟁 50주년 자료에서 발췌함.]

  1) 6 25전쟁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패망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단정책에 의해 비롯된 전쟁으로 미소냉전의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 북한 공산정권의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와 모택동의 지원하에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38도선을 돌파 남침한 것을, 한국과 참전국이 함께 개전 초기에 북의 공격을 막아내어, 우리가 공산화되는 문턱에서 북의 의도를 좌절시킨 전쟁이다.

  2) 북한 김일성은 1946년부터 소위 "민주기지론"을 주장하여 북한을 공산체제로 만들고, 소련의 계획과 지원하에 북한의 모든 역량을 전쟁준비에 동원하였다.

  3) 1945년과 19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전차 및 야포 등의 지원을 스탈린으로부터 받아냈고, 중공군에 편성된 한인 약 4개 사단의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6.25전쟁 발발 당시 소련제 전차 등 최신 장비로 중무장되었고, 중국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이 축적된 막강한 전투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발발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치밀한 사전 준비에 의한 계획된 전쟁이었다.

  4) 이에 비해 남한의 군사력은 상대적 열세에 있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이후 국군은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낙후된 경장비 위주로 무장되어 있었고, 전차나 대전차 화기가 전무한 상태에서 공비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전술훈련도 실시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5) 또한, 북한과의 힘의 균형에서 열세라고 판단한 한국정부는 전차, 항공기 등의 무기지원을 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주일미군의 해 공군력으로 북한의 침략을 억지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으로 인해 거절당했다. 따라서 한국군은 겨우 국경을 경비하고 내부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치안군 수준의 장비로 경무장되어 있었고, 한반도에서의 힘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다.

  6) 이러한 남북한의 군사력 불균형은 전쟁 발발 초기에 여실히 드러났다. 서울은 북한의 기습남침 3일만에 함락되었고, 국군은 북한의 전차를 대전차 무기 하나 없이 맨주먹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7)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군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 3일 오산에 투입되었다. 스미스 부대는 일본에서 점령군으로서 안일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전투부대로서의 훈련도 충실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조되어 파견되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이들 또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대전차 무기도 재대로 갖추지 않은 채 전투에 투입되어 막대한 손실을 당하였다.

  8) 미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군은 기세가 높아져 더욱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전투력을 재정비한 국군과 미군은 지연전을 전개하여 낙동강을 연하는 최후의 방어선인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9) 북한군은 피난민으로 가장,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특히 미군은 피난민과 북한군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피난민에 대한 공포심을 가질 정도로 피난민을 기피하는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0)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총공격을 결사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재정비를 통해 반격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적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1) 승기(勝機)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유엔 결의안에 따라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감행하였다.

  12) 그러나, 예상치 못한 100여만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이 다시 피탈되고 탈환되는 과정을 겪었고, 6.25전쟁이 발발된 지 1년이 경과된 1951년 6월에는 다시 38도선을 중심으로 전 전선이 소강상태를 이루는 상황에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13) 북한과 중국은 막대한 인력 및 국력의 손실로 전쟁 수행능력이 고갈된 상태에 있었고, 미국도 공산침략자를 응징하였다는 명분과 더 이상의 확전은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최초의 휴전회담이 개막되었다.

  14)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전쟁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거듭하자, 한국정부는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을 북한에 보낼 수 없다는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과 지원을 약속 받음으로써 전후 한국 안보에 대한 보장을 확보하였다.

  15)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이 끝이 났으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고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 청하는 것보다 공동으로 청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꼭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조국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조국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묻는 베드로는 자신을 아주 관대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라는 것이 "해줄 수 있는" 어떤 권리가 아니라 "해야 하는" 의무임을 가르쳐 주신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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