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연중14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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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7-10 | 조회수1,416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 2003년 7월 11일 (금) -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수도생활의 아버지요 서방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Nursia)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위해 로마에 갔으나 얼마 후 도시민들의 무질서한 생활을 피하여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에 들어가 3년간 은수자 생활을 한다. 그 후 주변에 12개의 작은 수도회를 세웠다. 529년부터 후일 수도생활과 종교문화의 중심지가 될 몬테카씨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우고, 여기서 그 유명한 <수도규칙>(regula benedicti)을 저술하였다. 이 규칙서는 당시 서방과 동방의 수도전승을 총 망라하고 있으며, 성서묵상을 통한 풍부한 영적 체험과 함께 성인의 정신과 지혜를 담고 있다.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나 완덕(完德)의 길로 갔다. 교회는 8세기부터 7월 11일로 성인의 축일을 지낸다. 베네딕토 성인께 붙은 아빠스는 대수도원장(大修道院長, abbot/영, abbas/라, abba/히)을 뜻한다. 특히 아빠스는 베네딕토 수도회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등 대수도원의 원장을 칭하며, 주교(主敎)와 대등한 서열을 가진다.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규칙> 원문과 번역: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http://www.osb.or.kr 참조.)
[오늘의 복음] 마태 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17)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19) 그러나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교회와 복음의 결별?
엄격한 선교수행지침(10,5-15)을 내리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암시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당장에 이와 같은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 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받게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형태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 모양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유다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성령에 의한 변호보장 약속이며(20절), 둘째는 가족의 고발과 세상으로부터 받게될 미움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빛나는 승리나 커다란 효과가 보장되기보다는 처절한 박해가 준비되어 있음은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박해를 받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제자들도 스승의 길을 가게될 것이다.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 가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시며,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천상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무관심과 적대심을 만나게 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심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적대심은 박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는 복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때 복음이 취하는 태도는 박해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이리의 다른 점이다. 복음의 강점(强點)은 오히려 약함이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이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는 약하지만 청빈과 사랑과 봉사에는 강하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세상과의 법적 조약이나 협정을 통하여 확고한 지위와 특혜를 영위하고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타부" 등의 방패를 세상에 내걸고 온갖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신부(神父)인 나 자신도 그 맛에 젖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복음 선포자로서 복음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는 자신이 인간적인 인정과 보호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적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별다른 의미 없는 그 무엇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 복음이 지향하는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종국(終局)에 교회와 복음의 결별을 초래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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