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성녀 마르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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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7-29 | 조회수1,774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 2003년 7월 29일 (화) - 성녀 마르타 기념일 ▣ 성녀 마르타 기념일
[오늘의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 때에 19) 많은 유다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 동안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다. 21)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23)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24)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27) 마르타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마르타를 통해 보는 우리의 믿음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 출신으로 성서상의 성인이다.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된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바 루가복음 10장에 3번(38, 40, 41절),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번, 12장에 1번(12,2)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이다.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력도 있는 부호(富豪)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소생(蘇生)시킴으로써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셨다.(요한 11,1-44) 루가복음에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하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마르타가 많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으로써 그것을 마리아가 택했다고 하셨다.(루가 10,38-42) 그러나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을 빵의 기적으로 먼저 배불리신 후에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지 않으셨는가.(요한 6장)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조화(調和)를 필요로 하는 덕목일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470-547)이 "일하며 기도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 태도를 한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11,27)
마르타 성녀의 축일에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말씀(25-26절)과 마르타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27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병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틀씩이나 여유를 부리시다가(11,3-6), 결국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는 날(11,17) 베다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안장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이 상가(喪家)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루가 10,38-42 참조)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한다. 이는 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가 예수께 고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蘇生)시키심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이성(理性)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믿음(예수님)을 언급한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믿음(예수님)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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