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성녀 클라라 동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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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8-10 | 조회수1,23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2003년 8월 11일 (월)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성녀 클라라(1193-1253) 동정 기념일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성년 클라라는 1193년 이탈리아 페루지아현 아시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무 어려움 없이 자라온 클라라가 15세에 이미 결혼을 포기한 것은 1211년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을 만나기 위한 서곡이었던가? 그녀는 성인의 청빈사상에 크게 감동을 받고, 1212년 주님 수난 성지주일 밤, 포르지웅콜라 소성당에서 삼단 머리를 자르고, 화려한 옷을 벗어 던지고 모직 옷에 밧줄을 매고 수도서원을 올렸다. 성인은 클라라를 베네딕토 수녀원에 보낸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아버지와 삼촌들의 만류도 클라라의 집요함을 꺾을 수 없었고, 얼마 후 두 여동생도 언니를 따라 나섰으며, 부친의 사망 후에는 어머니까지 클라라의 정신을 따라 수도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이 나중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지도로 클라라가 1243년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에 창립한 클라라 관상수녀회의 시작이었다.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에게 조그만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지어주니 이곳이 클라라 성녀를 따르는 자매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들은 철저한 청빈생활과 엄격한 수도규율로 서민들의 귀감을 쌌다. 당시 기록들은 성녀 클라라를 칭찬하는 글들로 가득하다. 성녀의 마지막 27년간은 투병의 수도생활이었지만 항상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았고, 많은 고위 성직자와 교황까지도 친히 방문하여 성녀의 침상에서 영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성녀는 1253년 8월 11일 선종하기 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평화로이 출발하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좋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두려움 없이 가시오.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셨으며 항상 당신을 보호하셨고 어머니처럼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축복 받으소서,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나를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클라라 관상수도회는 1972년 6월 제주도 이시돌 목장에 처음 진출하여 현재 제주와 전주교구 두 곳에 있다.
[오늘의 복음] 마태 17,22-27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23)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가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당신네 선생님을 성전세를 바칩니까?" 하고 물었다. 25) "예, 바치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인두세를 누구한테서 받아 내느냐? 자기 자녀들한테서 받느냐? 남한테서 받느냐?" 하고 물으셨다. 26) "남한테서 받아 냅니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이렇게 하여라.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그 속에 한 스타테르짜리 은전이 들어 있을 터이니 그것을 꺼내어 내 몫과 네 몫으로 갖다 내어라."◆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두 갈래 서로 다른 길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한데 묶여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보도되지만 마태오는 약간 수정을 가했다. 마르코와 루가는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마르 9,30-32; 루가 9,44-45) 반면에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로 고쳤다.(23절)
이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한 단계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제자들의 귀엔 수난과 죽음은 크게 들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은 스쳐지나가기 때문이다. 크게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것은 스승의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러나 그 애도 뒤편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숨어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가야 하실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은 길 사이에 갈등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단락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처음 낚아 올린 물고기 입 속에서 두 사람 몫의 성전세 한 스타테르(이스라엘 은전 한 세겔)를 발견한 것이 대수는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만물은 언제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베파게의 당나귀: 마태 21,2-3, 최후만찬을 위한 방: 마르 14,13-16 등) 문제는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야훼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훼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도 여기에 근거한다.(요한 2,14-21; 마태 21,12; 26,61; 27,40; 마르 14,58; 15,29)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찾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實定法)에 권리를 양보하신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리 하셨다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때가 오면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가 선포될 것이다. 이는 인자(人子)가 자신의 죽음으로 취득한 자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지켜낸 아들에게 선사된 자유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는 누구나 이 무한한 자유를 나누어 누리게 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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