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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냥 내버려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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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3-08-13 조회수1,268 추천수6 반대(0) 신고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말씀(신명 34,1-12: 마태 18,15-20)

 

교회가 ’성인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복음에서 증명된다. 교회에 나갔더니 교인들한테 실망해서 나가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잘못된 선입견에서 온 실망일 수밖에 없다.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곳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교회 안에서 생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형제적 사랑을 잃지 않는 신중한 대화와 충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대화와 충고의 바탕에는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공동번역)이란 귀절은 마치 어떤 형제가 개인적으로 잘못을 끼쳤을 때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나, 원래는 "당신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이라는 새번역의 말씀대로, 교회공동체의 질서를 교란하고 잘못된 표양을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알아들어야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개인과 개인 사이에 잘못에 대한 문제는 내일복음에 나온다)

 

마태오복음이 씌여지기 전에도 이미 초대교회에서는 유다인의 전통을 따라(신명 19,15)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두세사람의 증언을 듣고 교회 지도자는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2고린 13,1-2참조).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에 보충하여, 공동체 전체에 해가 될 악표양이 눈에 띌 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먼저 그와 단둘이 만나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고,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증인삼아 더 데리고 가 다시 타일러 주라는 것이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그의 잘못을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삼단계 사단계의 <신중함>을 덧붙인다.

 

여기서 교회의 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교회에서의 파문이 아닌 지역교회에서의 처벌(또는 권한제한)이다. 지역교회란 무엇인가? 좁게는 교회의 한 단체일 수도 있고, 한 본당공동체일 수도 있다. 그 단체의 정신과 회칙에 맞지 않는 신자라 해서 다른 단체에서도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본당 신자가 아니라도 한 형제이듯이 내 단체의 일원이 아니어도 그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제자요 한 형제이다. 그러니 그를 죄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자명하다.(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도 친구, 형제로 여기셨다)

 

공동체 생활을 해보면 분명 맺고 끊어야 할 경우가 있고, 풀어 해결해주어야 할 경우도 있다. 지도자가 우유부단하게 맺을 때 맺지 못하고, 풀 때 풀지 못할 때 결국에는 더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만다(맺다/풀다는 말은 어떤 처벌과 결정을 말하는 유다교의 법적용어다). 분명 맺고 끊어내야 할 경우인지 알면서도 곤란한 일은 그냥 내버려두고, 결국엔 후임자만 힘들게 만드는 경우를 적지않게 본다. 한편 한 사람의 명예와 치유를 위해서 풀어주어야 할 경우가 분명해도 전임자의 눈치만 살피고 머무적거리는 경우 또한 보았다.

 

반대로 어떤 지도자는 마치 자신이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태도로, 조그만 실수와 잘못에도 마구 사람을 잘라버리는 경우도 있다. 정말로 결단이 필요한 경우라도 삼단계 사단계의 신중함으로 한 개인을 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다수결 원칙으로 한쪽으로 힘을 몰아 할 것도 아니고>, 오직 기도로 주님의 의견을 경청해야 함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세 사람은 바로 신중한 결단에 도움이 될 증인이 되는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들이 모여 당신의 이름으로 행사하려는 그 일에 사심을 버리고 당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으랴?

 

마태오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의 어떠한 정당한 구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 그가 비록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이 전체 교회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신중히 조치하는 것도 지도자들의 몫이라는 이야기다 (’손이나 발이 당신을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지시오’라는 말(8-9절)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지체, 구성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이래저래 교회공동체라는 배를 이끌고 가는 선장은 책임도 권한도 무겁기만 하다. 그러나 독서에서 훌륭히 자기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고 여호수아에게 바톤을 넘기는 모세와 같이 아픔도 기쁨도 오직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주님의 종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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