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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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3-08-14 | 조회수1,89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8월 14일 연중 19주간 목요일 말씀(여호3,7-10.11.13-17:마태 18,21-19,1)
오늘 독서에서 요르단 강을 건너가는 이야기는 마치 홍해를 건너가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집트 군마가 쫓아오던 그 때보다는 긴박감이 덜하고 스케일이 적다는 점일 것이다. 홍해에선 허둥지둥 도망치며 건넜던 것에 비해, 요르단 강에서는 사제들이 궤약 궤를 메고 일련의 제의식을 갖추고 질서정연하게 건넌다는 것에서 훨씬 안정적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초점은 모세와 백성에게 놀라운 구원 업적을 이루어주셨던 하느님께서 이젠 여호수아와 백성에게도 변함없는 구원 의지를 보여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다만 그것만을 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랐지만 어릴 때부터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는 개신교의 찬송가를 들으면 누가 죽었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다. 그 때부터 요단(요르단)강을 건넌다 하면 곧바로 죽음이 연상되었다. 그렇다. 강은 생명의 젖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로를 방해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인생 최고의 장벽, 그것은 죽음이기에 요르단 강을 건넌다고 했나보다.
내 인생만 해도 그렇다. 하느님과 만나게 해준 출애굽이라는 예기치못한 구원의 사건 안에서 꼭 건너야 했던 거대한 홍해도 있었고, 그보다 작고 다양한 종류의 요르단강들도 무수히 있었다. 커다란 시련을 건넜기에 작은 고통들이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처럼 홍해가 크고 요르단이 작다 해서 결코 건너기 쉽지 않았다. 처음보다 서두르고 급박하게 건너지 않을 뿐이지 나름대로의 강은, 또 여울은 그만큼의 또다른 어려움으로 매번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여호수아가 사제들을 앞세우고 궤약 궤를 둘러메고 강을 천천히 건너듯, 한번 홍해를 건너본 사람들은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 뒤를 따라 차분히 시련의 강을 건널 뿐이다.
산과 강이 많은 곳이 경치가 아름답듯, 우리가 만들어내는 인생의 풍광 역시 다양한 크기와 깊이의 산과 강이 있어야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한 산과 강을 지나가는 데 필요했던 것은 돌이켜보면 주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이 주신 은총외에 더 무엇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당시에는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었냐’, ’고통과 장벽은 왜 이렇게 많냐’, ’기껏해야 이걸 주려고 그 고생을 시켰냐’....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외치던 그 불평 불만들을 나는 그분께, 또 주변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외쳤었다! 무사히 강을 건너고, 사막에서 살아남고도 내 힘으로 살아왔다며 은근히 목에 힘을 돋우었다!
오늘 복음에서 산더미같은 빚을 탕감해준 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이시고, 한푼도 갚지 않고 탕감받은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나다.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 수없는 빚을 탕감받은 이가 동료 인간의 허물 하나를 용서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일곱번이 많다고 하는 말이냐? 일곱 번씩 일흔일곱번인들, 그것으로써 네가 내 빚을 갚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일 것이다. 하느님께 갚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바로 네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에게 대신 갚으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을 겸손되이 드릴 수 있을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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