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연중19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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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8-15 | 조회수1,46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2003년 8월 16일 (토) -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69?-1038.8,15) 기념
[오늘의 복음] 마태 19,13-15 <어린이들이 막지 마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 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14)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 곳을 떠나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빈손의 진리
갈릴래아에서 공동체설교(마태 18장)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이제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신다.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으로, 당신을 잡아 심문하고 사형선고를 내릴 백성의 원로와 대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까지의 활동기간을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한다. 마태오복음은 대체로 마르코복음 10장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엮었다. 여기에는 마태오의 독자적인 사료로 보이는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생활"(19,10-12)에 대한 가르침과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20,1-16)를 첨가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이다. 마태오는 마르코복음(10,13-16)을 그대로 따르면서 두 부분을 삭제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께 축복을 요청하자 제자들이 먼저 이들을 나무랐다고 한다.(13절) 마르코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14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5절) 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마태오는 예수께서 화를 내신 부분을 예수님의 성정(性情)에 걸맞지 않다고 보아 삭제하였고, 마르코의 15절 또한 삭제하였다. 후자는 마태오가 이미 공동체설교의 첫 번째 규범(18,3)에 삽입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가진 것 없는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가까이하신다. 이런 부류에 물론 어린아이들도 속한다. 어린아이들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모자라고 불완전하며, 부모와 선생 등 그 사회의 성인(成人)들에게 전적으로 의탁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성인(未成人)들이고 미성년자(未成年者)들이다. 어린아이들의 표본은 배움과 수용의 자세에 있다. 예수께서 축복을 청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려던 어른들을 제자들이 나무란 것에 화를 내셨다면(마르 10,14), 제자들로 하여금 어린아이들의 표본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기대면 기대수록 다른 것을 믿거나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믿음과 수용 외에 어떤 것도 이를 받을 수 없다. 바로 어린아이들의 가진 것 없는 빈손과 설레며 기대하는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태도이다. 이 태도의 상징인 이마(머리) 위에 예수께서는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15절)
가톨릭교회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신 축복에 힘입어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신학을 정립하였다. 아이들이 비록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자신의 지력과 능력으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하여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머리 위에 예수님의 축복이 깃들여 있고,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도 늘 어린아이처럼 배움과 수용의 태도를 가진다면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14절)이 된다. 아이들의 미숙한 신앙 뒤에 어른들의 강한 신앙이 후견(後見)으로 자리하고 있음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의 깨끗한 빈손과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을 상업수단으로 삼거나 거기에 아무거나 가져다주려는 어른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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