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세례자 요한의 수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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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8-29 | 조회수1,635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2003년 8월 29일 (금)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늘의 복음] 마르 6,17-29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주십시오.>
그때에 17)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18)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하고는 23)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24)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25)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가져다주었다. 29)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헤로데의 생일(生日)과 요한의 사망일(死亡日)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 이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교회는 이 말씀을 받들어 전례적으로 요한 세례자의 탄생(루가 1,57)을 경축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마태 14,3-12; 마르 6,17-29; 루가 3,19-20)을 기념한다. 교회가 세례자 요한 성인(聖人)을 놓고 탄생과 죽음을 각각 기념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것은 성인의 삶이 예수님의 구원사에 미치는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으로서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즉 12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 요한의 수난기를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다.(마르 6,16)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마르 1,14), 그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生日)을 요한 세례자의 사망일(死亡日)로 만들었다. 헤로데가 요한을 잡아 가둔 이유는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17-18절)이고, 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유는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의 꾀임(19-28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17절의 기록을 오보(誤報)로 인정한다. 복음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했다고 하지만, 헤로디아는 필립보의 아내가 아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레타 4세의 딸과 이혼하여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로서 대왕의 다른 아들과 결혼하였고, 여기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헤로데의 족보"를 참조하라.)
헤로디아의 간교함에 넘어간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 시점에서 보도하는 이유는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례자의 수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명에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가 함께 할 것이며, 정의의 외침이 운명을 대변할 것이다.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여 사라지지만 그 외침은 결코 죽지 않는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헤로데 가문의 족보 ●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자주 "헤로데"를 만나게 된다. "헤로데", 또는 "헤로데 왕"이라는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58번 등장한다. 그 빈도를 살펴보면 마태오복음에 17번, 마르코복음에 11번, 루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15번이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헤로데가 다 같은 헤로데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뒤져보아야 한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이를 중심으로 유대교적 종교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333년 희랍의 알렉산델 대왕군대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의 정신적,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델(333-201), 프톨로메오 왕가(200-198), 셀레우쿠스 왕가(198-164), 하스모네오 왕가(163-64)가 차례로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스린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제국의 속주(屬州)로 삼았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로마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하스모네오 왕가는 아리스토불루스와 히르카누스 형제의 권력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이를 틈타 헤로데 가문의 안티파텔이 등장하여 권력을 거머쥔다. 헤로데 가문은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 사람들은 원래 유다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오 왕가의 통치시절에 유다에 합병되면서(BC.130년경) 유다백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안티파텔은 로마제국과 그의 황제들에 대한 적절한 충성심으로 신임을 받아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총독에 임명된다. 그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안티파텔은 자신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암살된다. 아들 헤로데는 이를 기회로 삼아 독보적인 위치를 잡는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과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헤로데 대왕이다.(BC.40-AD.4 통치)
헤로데 대왕은 치세 20년경에 대대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증축을 도모하고, 제국에 충성하며,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한다. 그는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다.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조달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아기 예수께서 이집트 피난길에 오른 것도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마태 2,13-18) 헤로데 가문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왕"으로 불린다. 헤로데 대왕은 생전에 10명의 아내를 두어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대왕은 마리암느 1세와 아리스토불을 낳았고, 아리스토불은 헤로디아를 낳았다. 대왕은 마리암느 2세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헤로데를 낳았는데, 그가 헤로디아의 남편이며, 여기서 살로메가 태어난다. 대왕은 말타케와 헤로데 안티파스를 낳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필립보를 낳았고, 또 다른 아내와 아르켈라오를 낳았는데 아르켈라오는 줄곧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마태 2,19: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대략 기원전 7-4년 사이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이 다스리게 된다. 이들 셋은 모두 이복형제들로서 아르켈라오는 헤로데 대왕이 주로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아 AD.6년까지 다스린다.(마태 2,22) 필립보는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AD.34년까지,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르단강 동서 쪽인 베레아와 갈릴래아 지역을 AD. 39년까지 다스린다.(루가 3,1)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가 신약성서의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고(마태 4,8),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판에서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총독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지만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출신임을 알고는 헤로데에게 보내어 심문을 받게 한다.(루가 23,1-12) 이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당시 갈릴래아 영주였고, 그 시각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또 한 사람의 헤로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르켈라오의 아들로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인데, "헤로데"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 12장부터 23장까지 15번 등장한다. 사도행전 25장과 26장에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12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인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2세"를 말한다. 아르켈라오는 이름난 폭군으로 10년간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 죽는다. 그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치관할에 편입되지만, AD.41년-44년까지는 아그리파 1세가, 그 후는 아그리파 2세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마태오복음 2장과 루가복음 1장에 보도된 예수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을 지칭하고, 그 나머지 부분과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하며, 사도행전의 헤로데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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