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일 강론 한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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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근호 | 작성일2003-09-13 | 조회수1,523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올 여름 다른 해보다 매미소리를 잘 듣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금요일 밤 매미소리가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곳곳에서 매미 때문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름이 같다고 여름날 나무에서 우는 매미가 미움을 받는 건 아니겠죠? 누구나 자기에게 피해를 준 것은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피해를 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유독 십자가만은 그 예외입니다.
해부학교수 하워드 매츠키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극형이 선고된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겨 많은 피를 쏟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안 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 최악으로 로마제국은 극형이 선고된 죄수는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이러한 십자가형은 기원전 800년대에 이미 시행된 것으로, 전쟁 포로들을 처형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원수들을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전쟁 포로뿐만 아니라, 식민지 범죄자 등 소위 ’인간 같지 않은 범죄자’를 처형하는 사형제도가 십자가형입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수치스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런 십자가를 상징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공경하고, 우리의 구원의 길이라 합니다. 그 십자가를 높이 받든다는 것, 수치를 자랑한다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그 수치의 십자가를 높이 받들고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수치와 잔인함의 상징인 십자가를 어째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높이 우러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전례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인간이 되고자 했던 교만과 그 교만으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불순종의 죄 때문입니다. 이 교만과 불순종은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 자기 잘되고자 하는 이기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죄와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원인인 교만과 불순종, 이기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교만과 불순종, 이기성은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요? 겸손, 순종, 희생입니다. 교만은 겸손으로 없어지고, 불순종은 순종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성은 타인을 위한 희생으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찬가를 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가 피조물 인간이 되시는 겸손의 극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순종의 극치를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더구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위한 희생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의 원인을 다 없애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높이 받들고, 우리 구원의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수치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 희생적 사랑으로 영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를 공경하는 날입니다. 진정 십자가를 공경하는 것은 목에 걸고 다는 거, 입 맞추는 거, 높이 달아 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 희생적 사랑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치스런 죽음도 기꺼이 받으신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수치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수치 때문에 구원되니까요.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 희생적 사랑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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