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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연중2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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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9-21 조회수1,568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3년 9월 22일 (월) -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8,16-18

<등불은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17)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18)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자.  

 

  우리는 지난 토요일 한국교회의 순교자 대축일을 지냈다. 대축일을 토요일에 지내지 않았다면 일요일로 옮겨 지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순서에 따라 토요일 평일복음으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가 8,4-15)를 들었을 것이다. 이 복음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그리고 "비유의 설명"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가 선호하는 하느님나라에 관한 비유이다.(마태 13,1-23; 마르 4,1-20) 그러나 복음이 전하는 비유의 서두를 보면 무엇에 관한 비유인지 전혀 눈치를 챌 수 없다. 물론 비유의 본문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서로 다른 조건에 떨어진 씨앗이 그 조건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은 뻔한 일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와 그 설명을 따로 제자들에게만 밝혀 주심으로써,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임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하늘나라의 신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10절)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선 제자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전적으로 제자단에게만 한정되어 머물러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 복음의 "등불의 비유"(16절)가 필요한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등불과 같이 등경에 올려진 채 빛나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등불의 비유"에서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16절)는 말씀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등불을 켜는 이유가 바로 빛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불에 비유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아직은 비유들 속에 감추어져 있다.(17절) 그러나 이 신비는 곧 드러나야 하고, 또 드러나서 등경 위의 등불처럼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을 때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즉, 십자가는 등경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등불로서 세상을 밝히 비추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오늘 비유의 마지막 구절로 넘어가 보자. 우선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18절)는 말씀을 소유재산에 대한 새로운 분배정의, 즉 "물질적인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원리로 알아듣는다면 실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진 것" 이란 물질적 소유를 뜻하지 않는다. 소유는 소유인데 신비에 관한 지식의 소유를 말한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통찰함으로써 얻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는 일이다. 관리는 신비에 대한 인식과 믿음, 그리고 증언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종말론적 보상률이 추가로 적용된다. 종말론적 보상률이란 복음서 모두가 즐겨 쓰는 개념으로서,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밝히는데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진 사람은 가진 만큼보다 더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줄로 알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항상 가지고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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