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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연중2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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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9-25 조회수1,268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3년 9월 25일 (목)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9,7-9

<요한은 내가 목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7) 한편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8)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또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되살아났다고 하는 말도 들려왔기 때문이다. 9) 그러나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보려고 하였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헤로데의 호기심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開始)를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둔 시점에 두었다.(마태 4,12; 마르 1,14) 그 후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는 반응과 함께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마태 14,1-12; 마르 6,14-29) 여기서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는 전승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삭제하고, 헤로데의 호기심을 덧붙여 그가 예수를 만나 보려하는 의도를 지적하고 있다. 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은 당시 누구에게나 있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바로 곁에서 보고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 팔레스티나의 최고 권력가인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가 관연 누구인지 궁금해하였던 것이다. 헤로데는 아직 예수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그의 귓전에 몰려왔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두고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아니면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헤로데에게 있어서 예수는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목베어 죽였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자기가 목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보도되는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련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가는 이 관련성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헤로데와 예수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예수를 정말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차피 법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루가 23,6-12) 그러나 그는 예수를 진정 알려고 하기보다는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한 번 보고 싶어했을 뿐이다.(루가 23,8)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이유는 예수를 경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동시에 종교적인 메시아여야 한다.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부분이 헤로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헤로데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것임으로 그는 자연히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결국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당황한 헤로데 대왕이, 겉으로는 자신도 경배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몽땅 죽여버릴 음모를 품지 않았는가 말이다.(마태 2,3.8.16) 헤로데 대왕은 그 음모를 실행에 옮겼고,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또한 겉으로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결국은 예수의 사형선고에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빌라도와의 반목을 깨고 친분을 다지게 된다.(루가 23,6-11)

 

  누구든지 예수를 대면하려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헤로데 대왕도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도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 했기에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그분께 다가서느냐에 따라 그분 또한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오실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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