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통...그 인간적인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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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미숙 | 작성일2003-09-25 | 조회수1,682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고통중에 계신 분들을 기억하며...
예수회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 그 인간적인 것>글중에서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象)...묵상을 위한 글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象)을 갖게 된다. 욥은 혹독한 고통을 겪은 뒤에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에 나는 당신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봅니다."(욥 42,5) 고통을 겪기 전부터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을 보게 된 것은 고통을 통해서이다. 욥은 고통의 바다를 건넌 뒤에야 비로서 "전에 나는 당신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고통을 겪으면서,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본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깊이 만나고 새로운 생을 살아가는지 모른다.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프고 힘겨운 일이지만 그 눈물이 영혼의 눈 속에 끼여 있던 먼지를 깨끗이 씻어주어 하느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고통을 통하여 차가우신 하느님, 잔인하신 하느님을 본다. 고통을 겪기 전에는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고통을 겪으면서 하느님 인상이 바뀌는 것이다. 고통의 무의미성 앞에서 납득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C.S. 루이스는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믿으면서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그의 부인이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는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갑작스레 잃고 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면서 위로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냉랭한 무관심과 하느님의 차가운 침묵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그가 전에 하느님에 대해서 가졌던 좋은 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느님은 더이상 자비로운 하느님이 아니었다. 루이스는 나중에 사별(死別)의 고통에서 헤어난 뒤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고통 중에서 정말 위험한 태도는 더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잔인한 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고통 중에서 잔인한 하느님, 인간을 치시는 하느님을 보기는 정말 쉽다. 역시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박완서씨도 남편을 사별한 뒤 불과 1년도 안되어 외아들을 잃게 되자 하느님을 잔인한 하느님으로 보게 된다. 마취과 전문의 과정 중에 있던, 미래가 창창했던 26살밖에 안 된 외아들이 죽자 발작하다시피 되어 십자가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기까지 하였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도 화가 나서 그것을 내팽개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들을 데리고 간 하느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수많은 날을 하느님을 원망하고 증오하였다. 그 원망과 증오의 말을 들어보자.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신은 있어야만 해."
하지만 박완서씨 자신이 얘기하듯이 그 원망과 울부짖음은 하느님이 계심을 믿기에 할 수 있는 행위였다. 가장 강한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시기에, 그 하느님에게 책임을 물으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먼 훗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되었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살긴 살았겠지요. 사람 목숨이란 참으로 (질기고) 모진 것이니까요.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런 처지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해대고, 원망하고, 십자가를 내팽개친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저주하고 떠나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을 때 언젠가는 지난날의 고통을 하느님 앞에서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 우리가 겪었던 고통은 구원적이요, 신학적인 체험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C.S. 루이스나 박완서씨의 체험은 절실한 고통이 평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관념들을 얼마나 뒤집어 놓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다음 글은 막스 루카도(Max Lucado)의 ’깨어진 창을 통해 하느님 보기’라는 글이다. 이 글 역시 하느님을 향한 평소의 우리 인상이 고통을 통해서 얼마나 쉽게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창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본다. 언젠가 그 마음의 창은 순백하리만큼 깨끗하였다. 하느님의 모습도 또렷하게 보였다. 맑고 평화로운 날, 언덕이나 골짜기를 보듯이 하느님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유리는 깨끗하고 창틀은 온전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있었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지 알고 있었다. 또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의 창이 깨졌다. 돌멩이 하나가, 고통의 돌맹이 하나가 날아와서 우리 마음의 창을 깨버렸다. 고통의 돌맹이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사별일 수도 있고, 이혼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병일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언젠가 고통의 돌멩이가 날아와서 우리 마음의 창을 산산조각 낸다는 사실이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돌멩이들이 날아온다는 사실이다. 그 돌멩이가 어떤 돌멩이든 결과는 같은 것이니, 마음의 창이 계속해서 깨진다는 것이다. 마음의 창틀을 박살내고 유리창틀을 조각낸다는 것이다. ....깨어진 창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기는 쉽지 않다. 이전에 그렇게 똑똑하게 보였던 하느님이 이제는 조각나 보이는 것이다. 깨진 조각들은 제각기 하느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굴곡시켜 보여준다. ....조각난 마음, 상처난 마음을 갖고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우리들의 묵상코너에 [묵상]글 올리는데 많이 쑥스럽습니다. 독서의계절 가을에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고통중에 계신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며 작으나마 그분들께 영적인 작은 도움을 드리고 싶어 그 분들을 위해 예수회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 그 인간적인 것>책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늘 은혜로운 날들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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