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헝가리의 엘리사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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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11-17 | 조회수1,627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 2003년11월17일(월)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1207-1231)
성녀 엘리사벳은 1207년 헝가리의 국왕 안드레아 2세와 안덱스-메란의 게르트루드의 딸로 태어났다. 1211년 성녀는 4살의 나이에 당시 교황 이노첸스 3세의 정략적 주선으로 독일 튀링엔 가문의 11살 헤르만과 정혼(定婚)을 하고 독일로 가서 미래의 시어머니 소피의 교육을 받으며 살게된다. 그러나 1216년 헤르만이 갑자기 죽고, 이듬해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나자 동생 루드비히 4세가 튀링엔의 영주가 된다. 결국 엘리사벳은 헝가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찍부터 그녀를 흠모해 온 루드비히가 사랑을 고백하자, 1221년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그들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서 3자녀를 두었다. 엘리사벳은 1225년 이곳으로 진출한 프란치스코회원들의 무소유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27년에 남편 루드비히 4세가 아뿔리아로 출정하는 제4차 십자군에 가담하였다가, 이탈리아의 오트란토에서 급서(急逝)하였다. 그 후 그녀는 부군을 잃은 온갖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성녀는 자녀들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한 뒤 자선과 청빈을 서약하고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이 된다. 성녀는 마르부르크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기력이 쇠잔된 성녀는 병을 얻어 1231년 11월 17일 새벽 향연 24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독일 사람들은 성녀의 젊은 청빈과 자선의 정신을 공경하였고, 그 때문에 이미 1235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는 오늘날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강변에 자라는 갈대와도 같습니다. 강물이 출렁이면 자신의 대를 굽히고, 강물이 차면 물에 잠기고, 강물이 빠지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힘으로 굽은 대를 세우며, 꿋꿋함을 회복합니다. 오직 겸손과 청빈만이 사람을 진정 기쁘게 하며 상한 것을 회복하여 바로 세워 줍니다."[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오늘의 복음] 루가 18,35-43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나자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38) 그 소경은 곧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39)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소경이 가까이 오자 41)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42)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43) 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참으로 "보는 자"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리고의 소경에게 광명을 주신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예수님의 일행이 그럭저럭 예리고(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에 당도했다. 예수님의 당도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길에서 구걸을 하던 소경 하나도 그 소식을 듣게된다. 마르코는 소경의 이름을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마르 10,46) 라고 밝히고 있다. 소경을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자렛 예수가 왔다는 말만 듣고 일단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질렀다. 소경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귀에 도달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던 소경은 결국 자신의 믿음으로 광명을 찾는다.(42절)
오늘 예리고의 소경 치유사화를 다른 많은 기적사화 중의 하나로 보기엔 너무 아깝다. 그 이유는 이 기적사화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소경의 치유기적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도 복음서 전체의 구조에서 같은 자리인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가 18,35-43) 그렇다면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행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기적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적 기적으로서의 소경 치유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기적에 앞서, 즉 예수께서 예리고에 당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음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 그것은 바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추종의 의미와 섬김의 자세"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 이어 즉각 "추종과 섬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사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가복음에는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다음에 오늘 복음인 예리고 소경의 치유사화를 배치하였다. 루가가 "추종과 섬김"의 언급을 다루지 않은 이유는 예고의 끝 부분에 마태오와 마르코에 없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리워 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가 18,34) 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종합하여 보면, 제자들은 두 눈을 뜨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자의 본질적인 부분인 수난과 죽음, 추종과 섬김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권위, 자리와 보상만 보려했다. 이러한 제자들에 비하여 예리고의 소경은 장님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경이면서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을 실제로 보게 해 주신 것이다.
끝으로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라 나섰다"(43절)는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티매오가 광명을 찾고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은 단순히 감사의 표가 아니다. 그는 곧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다. 그것은 바르티매오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마지막 일을 목격하고 증언할 진정한 "보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기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보통 볼 수도 없을뿐더러 보고도 믿지 않을 사람들이다. 참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 오늘 예리고의 소경처럼 말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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